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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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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스복음 그리스도교를 말하면서 이 복음을 끼워넣는다면, 사실 좀 문제가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 여기에 루아흐와 아트만의 차이를 구분 없이 말하고 있으니,영이니 혼이니 하다가 참나 같은 엉뚱한 소리 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와 그리스도교에서 언제 부터 참나와 양심을 찾았나? 도마스 복음이 잘려나간 건, 고차원적의 비결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이 문서 자체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하자 덩어리기 때문이다. '예수의 비유'라는 점에서 흥미로울 순 있겠지만,예수의 가르침이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동시대에 있었던 엘리트적이고 비의적이었던 미트라교가초대교회와의 경쟁에서 밀렸다는 걸 충분히 알았다면 도마스복음으로 예수를 단장시키려는 짓이 그리 유효하지 않음을오래지 않아 깨달았을 텐데. … 미트라까지 갈 것도 없..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예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지, 죄인을 '만들어서' 부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피조물에게는 본디 죄가 없다. 다만 죄가 있다면, 죄가 없는데 있다고 정죄하는 죄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좋은 법을 주어도 이를 가지고 죄인을 만들고, 좋은 말을 주어도 또 죄인을 만들어 놓으면서, 끊임 없이 죄의 전가를 반복하고 있다고 할 만하겠다. "너는 죄인이 아니다." 이 말이 나오기 까지가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까지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말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
쓰레기통 속의 의 전통적인[개신교적인] 전가 교리에 따르자면,그리스도와 인간은 의와 죄를 각각 상호교환하므로서 구원이란 개념을 작동시킨다. 하지만, 이 전통적인 교리에는 다들 입을 다물고 있는 비밀이 하나 있다. 개신교에서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였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로 부터 의를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다루어지는 말을 들어보면 저게 아니다. 의를 얻어가는 건, 인류가 아니라 일부 기독교인 이른 바, 성도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고, 이 성도들의 죄를 대속하는 건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도를 제외한 나머지 인류가 된다. 즉, 전통적인 개신교의 전가론에서 등장하는 '그리스도-인류'라는 구도가실제 구현화하는 과정에서는, '인류-성도'라는 구도로 치환되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구제불능의 쓰레기로 전락시켜야만..
큰 교회 큰 교회라…[돌아보면, 확실히 예전보다는 이런 것들에 있어서 너그러워진 것 같다.] 옛 부터 대중적인 종교 시설 치고 작은 건 별로 없다. 종교 시설은 모름지기 클 수록 좋다.거대한 성당, 거대한 사찰, 거대한 성상, 거대한 군중 등등 역사적으로 본다면 종교 시설이 커지지 않는게 되려 이상할 것이다. 인간의 종교성은 모름지기 종교가 주는 경외심을 먹고 자란다. 성당이나 절의 각종 장식물이나 화려한 제의 그리고 그 것들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떨어질 수가 없으며,거대한 공간이 제공된다면, 그 만큼의 군중이 모일 수 있고, 군중들은 상호교감을 통해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공간은 가시적인 경계선 이상을 말하는 것이며, 건물은 선행하여 놓여진 공간에 벽과 같은 물질을 두른 것이겠다.] 또, 압도..
율법의 무게 바울이 율법-복음이란 구도로써 대립적으로 사용하고 부터, 율법을 마치 쓰레기 처럼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편견일 것이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
구원(기쁨) 구원이란 건 별개 아니다(그렇다고 해서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구원이란 건, 주린 자가 배부르고, 병든 자가 나으며, 의로운 자가 인정 받고, 마음이 깨끗한 자가 평화를 얻는 것… 예수가 "당신의 구원"을 말하며 베풀던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궁극적인 구원—영적인 구원—을 말하며, 생명나무와 연합하여 받게되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 것 역시 앞서 나열한 요소들을 빼놓고서는 있을 수가 없겠다. 생각해 볼 때, 구원이란 건 기쁨과 같다. 배부르고, 낫고, 인정받고, 평화를 얻는 것 등이 기쁨이 아니면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생이란 결국 피조물에게 주어질 수 있는 지고의 상태인 영원한 기쁨이 되겠다. 물론 이 기쁨은 궁극적으로 창조주의 기쁨이기도 하다..
초학주문(初學呪文) 동학-천도교의 주문에는 13자로 된 초학주문이란 것이 있다. 爲天主 顧我情 永世不忘 萬事宜하나님을 위하려거든 내(자기) 감정을 돌아보라(이하생략) 나는 이 주문이 아래 말씀에서 지시하는 바와 대동소이 하다고 본다(물론 신학적으로는 다름).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요상한 칼럼 오랜만에 어떤 칼럼을 보니 이런 글이 써있더라. 또 정말 구원 상실이 가능하다면, 구원받는 것은 누구 덕분이고 상실하는 것은 누구 탓인지, 예컨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 덕분이고, 구원 상실은 인간 탓인지 듣고 싶습니다. 만일 '인간 탓(because of man)'으로 '하나님 덕분(by virtue of God)'에 얻은 구원을 잃게 된다면, '구원하는 하나님 능력'보다 '구원을 잃게 하는 인간의 능력'이 더 강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약하고서야, 어떻게 시작부터 종말까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필자는 칼럼도 꾸준히 쓰고 있던데, 지금 까지 쓴 건 대체 뭐였을까? 질문의 주제는 칭의유보적이라고 하면서, 내용 전개와 결론은 확정적인[법정적인] 칭의 관념에서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