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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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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대속 혹은, 예속 예전에 썼듯이 나는, 더이상 원죄론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죄(죄성)을 상정하지 않는 경우 그리스도의 대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죄가 없다면 대속은 성립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희생도 무의미 해지는가? 물론 전혀 그렇지가 않다! 교단의 믿음에 따라선, 대속이란 원죄×구원론에 종속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대속은 원죄론이 없어도 되지만, 원죄×구원론은 대속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부패 원죄를 말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부패, 나아가 완전한 부패라는 개념에도 동의하는데, 나는 이를 선의 부재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다. 즉 유일지선(唯一至善)인 하나님과 동떨어진 피조물은 반드시 부패한 상태일 수 밖에 없으며, 빛이 없는 곳이란 암흑천지인 것과 같다. 그러나 원죄라는 별도의 신학적 장치를 ..
유교/성리학의 본질? 나는 유교/성리학의 본질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품격[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품격이 마음이 있는 것을 성품이라 하고, 행위로 발현되면 품행이라고 한다. 또한 갖춰진 품격에 주어지는 위상을 일러 품위라고 하는데,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이 품격을 유지·발전시켜나가는 것이 곧 공부다. 예 라는 건 품격에 격식을 갖추는 것으로써 마치 사람이 옷을 입듯이 품격에 옷을 입히는 것과 같은데, 옷이라는 건 외면의 프레임과 같아서 그 것을 걸치는 순간 사회적인 규약이 적용된다. [세상에는 제복의 무용론이 있다지만, 옷이 가지는 여러 제약을 본다면, 결코 무용하지도 할 수도 없다.] 의 는 품위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서 품격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사물이 이름으로 불려서 실체를 마련하듯이, 대저 (고저의) 품격은..
율법/양심 그리고 복음 행위라는 측면으로 부터 계속해서 조명해나간다면, 더이상 믿음과 행위를, 단순 대비시키기는 어려워 질 것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예수와 바울의 율법관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예수와 바울의 입장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막 써 재꼈다. 그래서 간단하게 언급한다면; 바울: 율법이란, 죄를 드러내는 도구와 같다. 그래서 나쁜 것을 피할 수는 있지만, 좋은 것을 내놓지는 못한다. 때문에 의로움을 위해서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요청이 필요해진다. 예수: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에서는 차이가 있어보인다. 공관복음: 바울과 달리 율법에서도 최소한의 좋은 것이 나올 수가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것은 복음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좀 많이 감상적인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칠성 칠성이란 무속에서 말하는 칠성신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전라북도의 전승을 대상으로 삼는다. 전북에서 전승되는 무가 중, 칠성풀이를 보면, 칠성은 두 가지 형태로 묘사된다. [음… 다른 지역거는 안봐서 모르겠지만, 대동소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칠성은 '칠성신'이라는 하나의 신격으로 묘사 일곱 아들로 구성된, '칠성'이라는 집합체로 묘사 아마도 현대인들에게는 2번째가 더 가깝게 다가올 듯 한데, 즉 (북두)칠성의 일곱 별에 대응하는 일곱 아들이 모여서 칠성신이라는 집합적인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곱 아들인 첫 째 부터 일곱 째는, 북두칠성의 탐랑-거문…파군으로 각각 대응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1번째는 전승에는, 일곱 아들이 모여서 칠성이 아니라 각자가 칠성이라는 하나의 신격이 되기에 칠..
인과불응(因果不應) 성경에서는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따르면 복을 받는다." 그러다가 다음에는 이렇게 말한다. "의인과 악인의 삶에 차이가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행한 바를 기억하고 갚아주실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세상에서, 원인과 결과라는 구도는 상당히 직관적이다. 그래서 여기에 젖어있다면, 신앙이라는 것도 인과적으로 생각해서 답을 구하려 한다. '착하게 살면(원인) 구원을 받는다(결과)'거나 '믿으면(원인) 구원을 받는다(결과)'. 그래서 이른 바 행위 구원이라는 것과 신앙 구원이라는 것은 원인의 내역만 다르지 결국은 같은 발상이며, 그렇기에 저 원인이라는 부분이 현실 세계에서 발생해야 한다면, 그 것은 결국 어떤 행위가 되어야 하..
ㅿ의 등장과 퇴장 2020-09-30 추가사항: 유비음? 무비음? 비음 기준으로 보는 자소분류 이 글은 항상 그렇듯, ㅿ에 대한 상상물이다. 상상하기 전에 두 가지를 전제한다. 고대 부터 현대 까지, 한국인들은 [z/ʑ] 음가에 대한 개념이 없다. 고대 부터 현대 까지, 한국어는 구개음화를 겪어오고 있다. ㅿ의 등장 파생적 등장(2020-09-26) 전제는 한국어는 고대 부터 주변 언어(일본어나 중국어)와 달리 유성 치경* 마찰음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별도의 훈련이 없는 순수한(?) 현대 한국인들의 언어 감각에서는 [z/ʑ]가 대체로 [d͡z/d͡ʑ](치경* 파찰음)으로 받아들여지지 도무지 마찰음 [s/ɕ]과 같은 계열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ㅅ의 유기음 설이 있지만). 그렇다면 ㅿ는 대체 어떻게 나..
평범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해지는. 앞에 글에 이어서 쓴다. 언젠가 부터 어떤 교우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소외 받고, 억압 받고, 고통에 겨운 사람들을 위해서 찾아왔다"는 식으로 가르키고 있던데, 그들의 성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째 점점 고착화되어 가는 것 같다. 때문에 이 글은 그런 식의 언더독한 사고 방식을 제거하는데 다소간의 목적을 가진다. 성경 속 구세주의 강림과 사역에는 다음의 두 가지 시선이 따르고 있어 보인다. 높은 자의 자비 평범화 내지 정상화 구제: 높은 자의 자비 먼저 높의 자의 자비 란, 쉽게 생각하자면, 전근대 시기 왕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자비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왕이 행차하다가 도탄에 빠진 백성이 다가와 '아이고, 왕이시여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요!'라고 했을 때, 자신의 백성을 성심성의 것 구..
평범하고 평범한 그래서 거룩한. 사람들에게서는 그 자신의 종교성이 드러날 때, 성스럽거나 비일상적이거나 혹은, 다른 것과 구분되는 어떤 상징 같은 것들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되려 평범하기 때문에 더욱 거룩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 이 것은 '일상적인 것이 거룩한 것이다'라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평범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만찬 지금의 교회의 성만찬은 전례 즉, 종교 예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구교나 신교 모두 마찮가지다. 개신교의 경우 간소화되었다지만 역시 교회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시간을 정해 행해지는 예배 겸 예식이다. 하지만, 사실 주님의 만찬은 회당에서 드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냥 식사를 같이 한 것 뿐이다. 물론 시기적으로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