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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율법/양심 그리고 복음

행위라는 측면으로 부터 계속해서 조명해나간다면, 더이상 믿음과 행위를, 단순 대비시키기는 어려워 질 것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예수와 바울의 율법관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예수와 바울의 입장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막 써 재꼈다. 그래서 간단하게 언급한다면;

 

  • 바울: 율법이란, 죄를 드러내는 도구와 같다. 그래서 나쁜 것을 피할 수는 있지만, 좋은 것을 내놓지는 못한다. 때문에 의로움을 위해서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요청이 필요해진다.
  • 예수: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에서는 차이가 있어보인다.
    • 공관복음: 바울과 달리 율법에서도 최소한의 좋은 것이 나올 수가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것은 복음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좀 많이 감상적인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묵은 술과 새 술이 모두 나오며, 사람들은 이를 모두 맛있게 먹는다(하지만 구분 가능)이라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 버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명한 말; "율법은 버려지지 않는다."
    • 요한복음: 바울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어 보인다. 율법은 있지만 새로운 새 계명으로 대체되고, 예수 자신이 진리이자 의로움 그 자체다. 그렇게 예수가 제시한 (새로운) 율법을 지켜야하는 것이니, 율법에서도 좋은 것이 나오고, 진리를 전달하는 메시아도 필요하다.

 

또, 제목을 수정하였는데, 말씀 보다 복음이 더 나은 것 같아서 변경. 그리고 본문의 선악 어쩌고는 편의상 사용했지만, 이렇게 써두면 왠지 부연이 필요한 것 같다. 뭔가 달리 써야할 것 같음.

 


 

모세 율법은 본디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다. "~하지 말라"는 것은 당대에 맞춰진 공동체를 위한 필언에 가까웠을 것이다. 율법은 할 것과 말 것을 제시하고 선악의 판별을 대신 해준다. 편리(?)하다면 편리한데, 여기에 바로 문제가 있게 된다.

 

즉 그 것은, 정형화된 내역이다. 바꿔 말하자면 일종의 표준적인 도덕적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점을 두고, 사도 바울은 율법을 보고 옳고 그름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는 여기에 곁들여 (이방인의) 양심과 (유대인의) 율법을 병치시키는데, 양심과 율법이란 결국 개인 혹은 사회에 내재되어 정형화된 판별 기준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정형화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간단한 예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경에 XX하지 말라는 말은 없잖아? 그럼 문제 없지.
성경에 YY해도 된다고 했잖아? 그럼 해도 되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본인들의 율법주의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오직 믿음만 있는데?' 하하, 헛소리 말아라!

 

비슷한 걸로 "술·담배하면 나쁘다"라는 것이 정형화되어 있다면[것으로 선악을 판별하고 있다면], 그 것이 바로 그의 율법(양심)인 것이다(여기서 술·담배의 유해성은 일단 제쳐두겠다). 이러한 율법행위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고착화된 판별기준으로서 틀에 박힌 움직임에 있는 것으로, 표준이라는 건 유익하고 안정적이지만, 어떤 개신-새로움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을 따라 비유컨데, 이 것은 흡사 물려 받은 밭에, 물려 받은 씨만을 뿌리는 것과 같다. 그들은 주인으로 부터 무상으로 씨앗을 얻었지만, 좋은 곳을 찾아서 씨를 뿌리려는 생각도 없고, 더나은 씨앗을 얻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묵혀있는, 판에 박힌, 타성화된 행위만을 반복할 뿐이다.

 

물론 이렇게 살면서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는 있다:

 

나는 정의로워, 나는 올발라, 나는 제대로 믿고 있어, 잘 따라 가고 있어…

['자기의'만으로 시도하는 해석은 협소하고, 그 것이 구속사역과 대립하는 구도를 갖추면 과장된다.]

 

자유는 여러 곳에서 쓰이지만, 수 많은 자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틀로 부터의 자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는 어떻게 주어 질까?

 

예수는 그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해와 함께[때를 맞춰]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쉰다면,

그 것이 마땅히 그 자유를 누리는 것 아니겠는가?

 

 

덧. '믿음'도 형이상학적일 수 있나? 그런 측면이 주어질 수 있지 않을까?

 

덧1.

좀 억지스럽지만 율법/양심을 글이라고 본다면(가시적/비가시적),

복음은 즉 말씀, 그 중에서도 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