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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를 백업하고서. 이제 막달이다. 그래서 백업을 어떻게할까… 생각하면서, OpenAPI나 이용해볼까? 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만들어져 있더라(감사). 티스토리는 그냥저냥 살려볼까 했는데 답이 없더라. ㅎ 블로그는 2년 뒤에 자동폭파라니 뭐, 알아서 사라지겠지. 그래서…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그냥 블로그질 자체를 좀 접기로 했다. [음, 접는다? 접는다기 보다는 바꾼다가 맞나?] 여기에 첫글 쓴 때가 2010년 5월이었으니 충분히 쓸만큼 쓴 것 같다(방치와 관리 사이긴 했지만). 이제 접속 불가로 막히기 전까진 한 두개 정도는 더 쓸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앞으로는 T자로 시작하는 (블로그 같은) 서비스는 정말 쓰지 말아야겠다. 두 번이나 피보고;; 아무튼, 여기는 이제 끝이다. 다른 곳에서 세탁이나 해야지ㅋㅋ
그리스도의 대속 혹은, 예속 예전에 썼듯이 나는, 더이상 원죄론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죄(죄성)을 상정하지 않는 경우 그리스도의 대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죄가 없다면 대속은 성립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희생도 무의미 해지는가? 물론 전혀 그렇지가 않다! 교단의 믿음에 따라선, 대속이란 원죄×구원론에 종속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대속은 원죄론이 없어도 되지만, 원죄×구원론은 대속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부패 원죄를 말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부패, 나아가 완전한 부패라는 개념에도 동의하는데, 나는 이를 선의 부재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다. 즉 유일지선(唯一至善)인 하나님과 동떨어진 피조물은 반드시 부패한 상태일 수 밖에 없으며, 빛이 없는 곳이란 암흑천지인 것과 같다. 그러나 원죄라는 별도의 신학적 장치를 ..
유교/성리학의 본질? 나는 유교/성리학의 본질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품격[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품격이 마음이 있는 것을 성품이라 하고, 행위로 발현되면 품행이라고 한다. 또한 갖춰진 품격에 주어지는 위상을 일러 품위라고 하는데,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이 품격을 유지·발전시켜나가는 것이 곧 공부다. 예 라는 건 품격에 격식을 갖추는 것으로써 마치 사람이 옷을 입듯이 품격에 옷을 입히는 것과 같은데, 옷이라는 건 외면의 프레임과 같아서 그 것을 걸치는 순간 사회적인 규약이 적용된다. [세상에는 제복의 무용론이 있다지만, 옷이 가지는 여러 제약을 본다면, 결코 무용하지도 할 수도 없다.] 의 는 품위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서 품격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사물이 이름으로 불려서 실체를 마련하듯이, 대저 (고저의) 품격은..
율법/양심 그리고 복음 행위라는 측면으로 부터 계속해서 조명해나간다면, 더이상 믿음과 행위를, 단순 대비시키기는 어려워 질 것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예수와 바울의 율법관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예수와 바울의 입장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막 써 재꼈다. 그래서 간단하게 언급한다면; 바울: 율법이란, 죄를 드러내는 도구와 같다. 그래서 나쁜 것을 피할 수는 있지만, 좋은 것을 내놓지는 못한다. 때문에 의로움을 위해서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요청이 필요해진다. 예수: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에서는 차이가 있어보인다. 공관복음: 바울과 달리 율법에서도 최소한의 좋은 것이 나올 수가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것은 복음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좀 많이 감상적인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칠성 칠성이란 무속에서 말하는 칠성신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전라북도의 전승을 대상으로 삼는다. 전북에서 전승되는 무가 중, 칠성풀이를 보면, 칠성은 두 가지 형태로 묘사된다. [음… 다른 지역거는 안봐서 모르겠지만, 대동소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칠성은 '칠성신'이라는 하나의 신격으로 묘사 일곱 아들로 구성된, '칠성'이라는 집합체로 묘사 아마도 현대인들에게는 2번째가 더 가깝게 다가올 듯 한데, 즉 (북두)칠성의 일곱 별에 대응하는 일곱 아들이 모여서 칠성신이라는 집합적인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곱 아들인 첫 째 부터 일곱 째는, 북두칠성의 탐랑-거문…파군으로 각각 대응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1번째는 전승에는, 일곱 아들이 모여서 칠성이 아니라 각자가 칠성이라는 하나의 신격이 되기에 칠..
인과불응(因果不應) 성경에서는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따르면 복을 받는다." 그러다가 다음에는 이렇게 말한다. "의인과 악인의 삶에 차이가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행한 바를 기억하고 갚아주실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세상에서, 원인과 결과라는 구도는 상당히 직관적이다. 그래서 여기에 젖어있다면, 신앙이라는 것도 인과적으로 생각해서 답을 구하려 한다. '착하게 살면(원인) 구원을 받는다(결과)'거나 '믿으면(원인) 구원을 받는다(결과)'. 그래서 이른 바 행위 구원이라는 것과 신앙 구원이라는 것은 원인의 내역만 다르지 결국은 같은 발상이며, 그렇기에 저 원인이라는 부분이 현실 세계에서 발생해야 한다면, 그 것은 결국 어떤 행위가 되어야 하..
퇴계의 성리학(리기·심성 등) 아… 이 블로그도 오래 썼지…… 이번엔 어디로 가지? 아무튼 문득, 퇴계 생각이 났다. 다산은 퇴계의 리기론을 보며, 도심과 인욕이라 하였고, 율곡의 리기론과는 관점이 다르다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나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퇴계의 리기론에 새 이름 혹은, 별칭을 붙여주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고. 그렇게 염두에 두고서 이름을 붙여본다면, 퇴계의 리/성를 공리사회성(公理社會性, 이하 공성)이라 하고, 다시 그의 기/심을 사기개인심(私氣個人心, 이하 사심)이라고 부른다면 의미가 더욱 정확해질 듯 하다(내용이 다르면, 말을 바꾸라고). [※ 반면 율곡의 리기론은 각각 통리보편성(通理普遍性 즉, 통성)와 국기개별심(局氣個別心 즉, 국심)으로 말해질 수 있다. 사회와 보편이 다르고, 개인과 개별이 다르다. 저 둘..
유비음? 무비음? 비음 기준으로 보는 자소분류 저번 글 ㅿ의 등장과 퇴장을 적은 뒤에, 몇 가지 사항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더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 한국어는 유기음과 무기음으로 대립하며 자소가 나뉜다. 동국정운이나 일본어 같은 경우는 청탁에 따른 무성음과 유성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옛한국어는 현대 한국어와 달리 유기음이 크게 발달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청탁으로 구분했던 것 같지도 않는데,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삼은걸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비강음(콧소리)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을까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유비음과 무비음 그렇게 바라보니, 정음에서도 그렇고 비음을 기준으로 삼아도 자소 분류가 상당히 잘 맞아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예전에 적어둔 것을 참고하여 표로 구성하였다. 1. 불청불탁이다. 2. 끝소리 ㅿ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