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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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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천지창조와 어묵동정 어묵동정(語默動靜) 먼저 어묵동정을 말하자면, 불교 용어로써 행주좌와 어묵동정으로 무시선과 같은 선의 일상성을 말하는 것이나, 동학-천도교에서 이를 차용하여 쉼 없는 하느님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변용하였다. 行住坐臥語默動靜 何莫非天地鬼神造化之跡 행주좌와와 어묵동정이 어느 것이나 천지귀신조화의 자취아님이 없건마는 이에 나는 이를 다시 차용한 뒤, 살짝 비틀어서 행위자의 상태 용어로서 다시 정의하되 마음아룀과 엮었다.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語: 말함. 默: 고요. 動: 움직임. 靜: 멈춰짐(멈춰 있음). 이렇게 마련된 4가지 상태는 서로 관계될 수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語動: 행위자가 말 즉, 목표 및 논리성을 가진채 움직이는 것이다. 默動: 행동이 말로 표현되지는[구성되지는] 않으나 그 행위(현상)..
논리적인 아픔 — 복음과 신학 논리로 아플 수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논리 자체는 아픔도 아플 만한 것도 없지만, 하지만 어떤 논리의 사용자들은 그 논리로 인하여 때때로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아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사고를 따라서 흘러간다. 내가 느끼는 장로교단의 칭의론은, 이리 전개되어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어디서 부터 잘 못 된 것일까? 칭의론을 살펴볼 때, 다음의 두드러진 경향성을 만날 수가 있다. 바울 서신과 복음서 간의 극단적인 비중 차이 예정에 대한 극도의 의존성 무용지물이 되버리는 복음 성경은 통합적으로 보아야 한다지만, 이 칭의론만 등장하면 없던 일이 되버린다. 놀랍게도 바울의 언사는 전면에 서지만, 예수의 발언은 칭의에 대해서 그 어떤 영향도 없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인용한..
맡겨진 선(善) — 구원확신과 행위공로 본문에서의 전제: 완전한 타락, 예선적 견인(預善的 또는, 예언적-), 유보적 칭의. 행위와 믿음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사람들은 행위는 행위, 믿음은 믿음이라 말하지만, 실은 믿음도 행하는 중에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러한 바를 일러 '신앙행위'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은 신앙을 자랑하고 확신하는 것이지, 행위를 자랑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실은 말장난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에 행위와 믿음을 가르는 건, 그저 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에, 추가로 '공로'라는 개념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게 되지만, 그건 직접적인 설명이였기 보다는 반대를 위해 사용되던 개념이었을 뿐이다. 이제 내가 볼 때, 여기서의 핵심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한 기조인 것이며, 그 것은 결국 구원을 위한 선(善)..
분할수면과 시간전례 요즘 잠을 어떻게 잘까로 여러가지 생각하다가 '혹시 잠도 나누어 잘 수 있지 않을까?'하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해서 찾아보니 이른바 분할수면(다상수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더불어서 이와 연관된 한가지 의문이 풀렸다. ※ 다상수면이 제대로된 수면방법인지에 대한 건 논란 있음.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에는 역사적으로 시간전례 또는 매일전례라는 것이 있다. 그 중 정교회의 편성표(?)를 보면 다음과 같은데, 만과(저녁기도) 석후과(제1밤기도) 심야과(제2밤기도) 조과(아침기도) … 등 이중 위의 2·3항에 대한 정교회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전략) 석후과는 저녁 식사 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드리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세가지 주제에 초점을 둡니다. 먼저 지나간 하루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밤 ..
기도에서 반복되는 네 가지 특질 그리스도교인은, 어떻게 해야 옳바른 그리스도교인으로 남을 수 있을까? 최근의 벌어진 사이비 이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정상적인 교단에 잘 나가다가 이상대로 빠져더니 맛이 가버린 교우들;; 반대로 자기우월주의 빠져서 헛소리나 하고 있는 이른바 정통적통이라는 교우들……. [자기우월주의에는 수가 많든 적든, 정통이든 이단·사이비든 별관계 없어보인다. 어차피 정신승리 영역일 테니.] 나 역시도 저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나를,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할까? 열심히 성경을 읽고, 신학적 지식을 쌓고, 정도를 걷는 이들 위주로 교류하면 되는가? 정말 좋은 방법이다. 근데 알아보면, 주께서 '이렇게 해라'하고, 친히 명하신 것이 있으니 바로 '기도'다. 기도..
아스키에 기반한 로마자 표기 아스키 IPA들을 참고, 유니코드 표기에 반영. 표 한글 교환부호 로마자 아스키 한글 교환부호 로마자 아스키 ㄱ k g k g k g ㅏ a a &“ ㄴ n n n ㅑ ya ya y&” ㄷ t d t d t d ㅓ V v/ʌ/, eo/ɤ/ V, o- ㄹ r/l r/l r`/l ㅕ yV yv jV ㄽ ls ls ㅗ o o o ㅁ m m m ㅛ yo yo jo ㅂ p b p b p ㅜ u u u ㅅ s c s c s ㅠ yu yu jyu ㅆ sx/ss ㅡ U(M) eu wu @/ə/, M·u-/ɯ/, i“/ɨ/ ㅿ X(NJ) (·)nj J+z\ ㅣ i i i ㅇ -/x - - ㆍ O wo/ɒ/, aw/ɑ/ A., A ㆁ +/N +/ng N ᆢ yO yw ㅈ C J(S Z) tc ts tc ㅐ E ae E ㅊ..
불과 열의 기술: 감정의 발화 불과 열이라고 해서 실제 불과 열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것과 유사한 감각을 경험하는 것으로서 실제로는 신체의의 어떠한 기전에 따라서 일어나고 또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은 감정의 발화라고 적었지만, 감정 자체라기 보다는 흥분이나 긴장감, 혹은 스트레스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본론을 말하자면 감정의 발화란, 이러한 감정들을 탈 것으로 처리 즉, 불의 3요소 중 연료(가연물)로 쓰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3요소가 갖추어지면 자동으로 불이 붙는다. 연료(가연물): 감정(긴장, 흥분, 스트레스 등) 산소(공기): 숨/호흡 열(점화원): (시선·의식)집중 기본 사항으로는 탈 것으로서의 감정을 서서히 태워가며 지켜보는 것인데, 탈 것을 화로에 깥아두고서, 풀무질로 공기를 적당히..
불과 열의 기술 나는… 물질적·신체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반드시 물리적이거나 생리적인 현상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날 까지도 프라나니 원기[에너지]니 하는 걸로만 붙잡고 설명하면서, 그 것의 실재를 주장하는 건 정말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저 불과 열의 기술은 대체 무엇을 다루는 건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항온동물이며 그 몸은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가령 주먹을 쥐고 있거나 신체 일부가 서로 접혀있으면서 그 안의 열이 달아나지 못한다면, 평소 보다 더욱 따뜻하거나 혹은 뜨겁게 달구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다. [※ 신체의 접힌 부분에 살짝 여유가 있다면 더욱 잘 반응한다.] 이런 단순한 현상이 소위 말하는 에너지의 정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불과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