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로 아플 수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논리 자체는 아픔도 아플 만한 것도 없지만,
하지만 어떤 논리의 사용자들은 그 논리로 인하여 때때로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아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사고를 따라서 흘러간다.
내가 느끼는 장로교단의 칭의론은, 이리 전개되어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어디서 부터 잘 못 된 것일까?
칭의론을 살펴볼 때, 다음의 두드러진 경향성을 만날 수가 있다.
- 바울 서신과 복음서 간의 극단적인 비중 차이
- 예정에 대한 극도의 의존성
무용지물이 되버리는 복음
성경은 통합적으로 보아야 한다지만, 이 칭의론만 등장하면 없던 일이 되버린다. 놀랍게도 바울의 언사는 전면에 서지만, 예수의 발언은 칭의에 대해서 그 어떤 영향도 없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인용한다면 요한복음 몇 구절 정도?
이러한 사고 방식은 처음 부터 바울만이 칭의론을 이론적으로 말했고, 예수는 비유나 사용하면서 신비롭게 복음을 전했다는 뭐 그런 관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 칭의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완전히 배재되며, 이른 바 (교회가 지어놓은) 바울 신학의 들러리나 하는 처지가 되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를 내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재하는 이론은 그 쪽으로 공격받기가 너무도 쉽고 또 아프다. 그러니 계속해서 달아나는 식으로 논리를 지을 수 밖에 없게 되버리고, 그 때마다 예수의 복음은 공기화되면서 내세적이라거나, 유대교에 한정된 논리라거나, 십자가 이전 소리니 하는 식의 뒤쳐지는 말로 전락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전제
그래서 나는 다음의 역사적인 전제를 집어넣어서, 위와 같은 비대칭적인 괴리를 봉합하고, 처음에 말했듯이 이른 바 통합적인 사고를 시도코자 하는데, 그 것은 다음과 같다.
- 복음서는 반드시 바울 서신에 후속한다.
- 복음서의 기자는 바울 서신과 그의 신학을 익히 알고 있다.
이는 먼저 등장했던 바울의 칭의론은, 약간 후대에 나타난 복음서에 내재되는 형태로 실렸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바울의 언사와 예수의 복음 결코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형태로 접혀진다.
즉, 바울의 칭의론은 복음서 안에서 예수의 행적을 좇아가며 실제화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적으로 예를 든다면, 주님은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지만, 만일 이를 칭의론과 연관 짓는다면 이렇게 말해질 수가 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 머물 수 있는 자격[지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뻘짓하다가 쫓겨날 수도 있다는 내용은 덤.]
칭의와 선행
사실 칭의와 선행은 완전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칭의는 지위적이고, 선행은 실천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겹치는 요소가 없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실질적인 두 가지의 시비 요소가 있을 수 있다.
- 선인-의인이라는 모종의 관계성 때문에 발생하는 언어·사회적인 문제.
- 구교와 신교의 반목했던 역사 인식과 주도권 싸움에 따른 신학·정치적인 문제.
첫 번째는 그리스도교의 개념화 학습이 안되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니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일반 사회적으로는 꾸준히 제기될 수는 있겠다. "왜 착한 일을 했는데, 의인이 아니냐고[구원 받지 못하냐고]."
두 번째는 음…[일단 모른겠다는 내용이다.]
즉각적인 칭의와 유보적인 칭의
※ 명칭은 대충 붙인 것.
개인적으로 전자는 오독에 따른 논리 전개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복음서와 서신서가 면밀하게 짜여있다는 관점으로 읽어간다면, 도무지 즉각적인 칭의론이 도출 될 수가 없다. 물론 예외는 있을 수가 있겠지만.
주님의 말씀과 바울의 편지 모두, 완전한 형태의 의로움(이 용어 수정이 필요)은 나중을 기약하는데, 그냥 생각해 봐도 이 편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로 부터 택자와 불택자가 갈라지며, 이른 바 24시간 풀가동하는 유황 스팀 지옥도 어색하지 않는 것이다.
[+ 완전한 형태의~ 라는 식으로 사용하다면, 칭의가 이중이 되버리는데, 전부터 제기되었던 말이다. 그래서 달리 구분한다면, 나는 그 것들을 '소명'과 '칭의'로 이름하여 구분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부정하거나 전제 삼지 않으려는 태도가 불러오는 것이 바로 '극단적인 예정 의존성'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정론이 등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다시 칭의론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볼 때, 즉각적인 칭의는 거듭남(중생)이나 (즉각적인)회심과의 혼동 및 혼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걸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오독인 것이다. 전혀 다른 개념과 짜맞추면서 처음 부터 잘 못된 전제로 부터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 예전에 나는 칭의와 중생이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좀 다르게 생각한다. 둘은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완료형이지만, 후자는 지금 부터 시작인 것. 그래서 용어를 더한다면, 각각 종말과 개벽으로 상징화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바울이 급진적인 종말론자였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장 오늘내일하며 세상이 뒤집어질텐데, '칭의-성화'의 단계적인 절차를 밟으며 나아간다? 그건 아무리 봐도 전혀 아닌 것 같다.
전에 했던 이 말 속에 '즉각적인 칭의'에 대한 해답이 나올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는 즉각적인 칭의란, 실은 그에게 내일이라도 당장 찾아오는 종말이라는 상황과 큰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는 종말을 살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 칭의도 끝자락에 놓여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그의 칭의론은 '예기적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종말에 대한 예기적인 칭의'으로서, 후대의 시점으로 평한다면 그 것은 좀 더 뒤로 밀려날 필요가 있는 것이며, 본디 문제의식으로서 제시된 양식은 다른 이름, 예를 들자면 부르심(소명)-거듭남(중생)과 같은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고, 칭의라는 것은 유보적인 상태로 이양된다.]
성화?
또한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성화라는 개념도 오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순화'라는 선물이 주어질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지만, 그 것이 어떠한 단계적인 형태로써 제시된다면, 그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보다는, 인간성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칭의라는 건 지위적인 것이지 어떠한 행위나 변화를 담보하는 사항과는 거리가 멀다.
덧. 바울은 한 명이겠지만, 바울 학파는 몇 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혹, 그들 사이에서 노선이 갈릴 가능성이 있나?
추가사항
- 2020-07-07 바울 관련 보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