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서의 전제: 완전한 타락, 예선적 견인(預善的 또는, 예언적-), 유보적 칭의.
행위와 믿음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사람들은 행위는 행위, 믿음은 믿음이라 말하지만, 실은 믿음도 행하는 중에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러한 바를 일러 '신앙행위'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은 신앙을 자랑하고 확신하는 것이지,
행위를 자랑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실은 말장난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에 행위와 믿음을 가르는 건, 그저 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에,
추가로 '공로'라는 개념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게 되지만,
그건 직접적인 설명이였기 보다는 반대를 위해 사용되던 개념이었을 뿐이다.
이제 내가 볼 때, 여기서의 핵심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한 기조인 것이며,
그 것은 결국 구원을 위한 선(善)의 사유화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자인 성도의 선이, 자기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소유하지만 사유되지는 않는 선
보통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고 믿는데,
이 선이란 것은 공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적인 것도 아니다.
또, 절대 다수를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부 소수를 위한 특수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를 가질 수가 있지만 결코 사유화되지는 않는다.
[그 것은 빌린 것으로서, 언제든지 반납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이라는 카테고리를 두고 말 할 때 이렇게 물을 수가 있다.
"이 믿음이 네 것이냐? 아니면 이 행위가 네 것이냐?"
생각볼 때, 무언가 자랑하고 확신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 것은 근본적으로 내게 없는 것에 있는 것이다.
["내게 없는 것에 있는 것이다"(?) …표현이 좀 이상한데??]
확신과 공로
내게는 신앙도, 행위도, 모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확신도 가질 수 있고, 공로도 쌓을 수가 있다.
물론 그 것들의 소유권 어디까지나 맡겨진 것[빌어진 것]이지만!
또, 나는 내 신앙을 자랑할 수도 있으니
그 건은 내가 구원을 받을 가능성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는다거나,
나는 구원의 확신으로 두려움이 없다거나,
하… 숄직히 말홰서, 늬들, 쥭어 봣셔요?
…
아무튼 위와 같은 시각을 갖는다면,
복음서 전반에 등장하는 공로 개념과 바울의 유보적 칭의론 모두를 만족할 수 있게 된다.
덧. 동학적 개념을 빌어올 때(물론 가짜),
성모 마리아를 성모(聖母)로서 받아들인다면,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것와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써,
그녀와 동등하게, 성인(聖人)으로서 말해질 수 있다.
이렇게 판단한다면, 개신교에서 구교식 성인공경을 폐지한 것은 옳다.
단, 성인공경을 폐지할 경우 성모공경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만인에 대한 성인공경을 신설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덧2.
본문의 공로설은 신인협력을 상정하고 있지 않다.
선행과 공로를 설명할 때, 꼭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을 전제해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꽃은 시들었어도 잔향이 남을 수 있는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