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동정(語默動靜)
먼저 어묵동정을 말하자면, 불교 용어로써 행주좌와 어묵동정으로 무시선과 같은 선의 일상성을 말하는 것이나, 동학-천도교에서 이를 차용하여 쉼 없는 하느님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변용하였다.
行住坐臥語默動靜 何莫非天地鬼神造化之跡
행주좌와와 어묵동정이 어느 것이나 천지귀신조화의 자취아님이 없건마는
이에 나는 이를 다시 차용한 뒤, 살짝 비틀어서 행위자의 상태 용어로서 다시 정의하되 마음아룀과 엮었다.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 語: 말함.
- 默: 고요.
- 動: 움직임.
- 靜: 멈춰짐(멈춰 있음).
이렇게 마련된 4가지 상태는 서로 관계될 수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 語動: 행위자가 말 즉, 목표 및 논리성을 가진채 움직이는 것이다.
- 默動: 행동이 말로 표현되지는[구성되지는] 않으나 그 행위(현상)으로서 감지되는 것이다.
- 구성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목적을 잃어버림으로써 말의 방향성이 형성 되지 않는 경우도 포함.
- 語靜: 말은 있지만 행위는 없는 즉, 현실화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상념들인 것이다.
- 默靜: 행위자에게서 멈춰 있는 혹은 감추어져 있음으로서 지각 되지 않는 것이다.
- etc.
여기에 대한 짧은 예시를 든다면, 주님께 "갑니다"하고 마음아뢰고서 움직일 경우 이 것은 목적을 향해 가는 語動이다. 그런데 '간다'는 행위에는 말 없이 여러가지 부속적인 것들이 따라 붙는데, 이 것들을 말하자면 默動이라 할 수 있겠다.
※ 상태들은 동시적이다.
천지창조
나는 창세기의 창조 구절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신화로 취급하며 읽어가기에는 영 재미가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좀 다른 관점으로 성경과 신앙에서 무리 없이 녹아들도록 짜보았다.
이 관점에서의 기준은 아담이며 이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 사람 아담은, 인류라는 종(種)으로서 첫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첫 번째 즉, 믿음의 첫 사람이다.
[아브라함과 겹치지는 않을 듯;;]
이렇게 아담을 과학적 사실이 아닌, 신앙적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과학을 도용하다가 유사과학으로 빠질 염려가 없다.
- 하와의 탄생에 대한 어원적 유래가 어떻든, 그녀는 뼈 즉, 아담이 지닌 신앙적 정수(精髓)의 소산인 것이다(갈비뼈는 가슴에 붙어 있다).
- 가인이 두려워 피해다닌 사람들을 논하기에 적절하다.
- 타락과 원죄에 대한 관점이 신앙적 분실로 설명될 수 있다.
- 아담을 비롯한 선조의 수명은 신앙의 깊이와 같다.
- …뭐, 대충 이 정도?
억지스러운 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괜찮아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사람이 등장하기 까지의 천지창조란, 첫 사람이 지니는 신앙적 산출물로서, 행위자의 어묵동정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천지창조의 어묵동정
어둠과 심연 | 하나님의 영 | ||
멈춰있는 것들, 靜物 | 빛 | 말씀. 가라사대…, 語 | |
궁창 | |||
뭍과 바다 그리고 식물과 나무 | |||
움직이는 것들, 動物 | 해와 달 그리고 별 | 빛 | |
물고기와 새들 | 궁창과 바다 | ||
뭍짐승과 사람 | 뭍 | ||
쉼(휴식) | 침묵. 고요함, 默 |
이렇게 첫 사람은 믿음의 기원을 칭송하며, 큰 것과 작은 것, 위와 아래를 짜내어 전하는 것이다(자평이지만 기존의 선공간-후내용물 보다는 이렇게 분해하는 편이 훨 낫다고 생각함).
덧.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겼다.
한밤은 세상을 흑암 중에 몰아넣고
사물은 어둠에 잠기며 빛을 잃지만,
정오의 때를 맞아서 나는 홀로 서 있다.
대낮과 같은 환한 밝음 속에서
가득찬 빛이 쏟아지는 가운데서
따뜻하고,
평안하고,
고요하게
일깨우니,
부어지는 빛은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직면하는 빛은 내가 그로 부터 답을 구하려는 것을,
실감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