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끔일지/메모장

칭의는 선결조건인가?

나는 칭의가 형식상 선행적으로[선언적으로만] 놓여진다는 점을 일단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상기의 전제를 따라서 '의인이면서 죄인' 같은 모순되는 논지가 사용되지만, 아무리 봐도 철퇴를 맞지 않고 지금 까지 버티고 있는 게 용해 보인다.

예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일단 성경에서는 의인과 죄인을 혼용한 적이 없다. 죄인이면 죄인이고, 의인이면 의인이다. 또한 적어도 예수나 바울의 언행을 따른다면, 칭의란 결과로서 부여받는 형태일 뿐이지, 이 것을 조건삼아 전개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의 예를 본다면, 그가 의롭다고 인정 받은 것은 소명을 받은 뒤, 약속이 이루어질 동안 믿음을 지킴으로써[하나님의 말씀에 속해(참여)있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것이고, 예수 역시 제시된,  구원자로서의 약속에 대한 사역을 이루어가면서, 믿음을 지켜내는 것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신약이라서 구약과 달리 뒤집은 논리를 펴는 것인가?

[나는 예수 이후 즉, 신약의 경우에는 구약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예수 자체가 약속(의 조건, 본보기)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칭의를 선행조건으로 두는 건 명백하게 인과가 역전된 것이며,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가 말해지기 위해서는, 칭의→영화/성화 같은 단계적 형태의 부차적인 논리가 끼어들게 된다. 예수의 말 처럼(그 것이 비판하는 말이었다 해도) 의인은 굳이 불리지 않아도 되는 '건강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왜, 이 전제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건지? 배움이 짧아서인가? 알 수가 없다.




종말적 칭의일변

만일 칭의일변으로 간다면 그 것은 다음 처럼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칭의-성화 구조와 유사하지만-_-;;

분명히 말하지만 성경에서 이런 식으로 구도를 잡은 적은 없다. 시대차일지 몰라도 바울과 요한이 그리는 구도는 달라 보인다. 그래서 이런 구도는 차이나는 두 그림을 중첩시켰을 때나 가능할 수 있겠다.

[ { (그리스도로 부터) 전가된 의 }로 부터 ] 성취한 의

              ├ 피동적 부여  →  └ 사역적 부여

              ├ 요한* : 중생 → 칭의 ┬ 같은 맥락

              └ 바울서신: (성화)칭의  ┘

             └──── 한덩어리 ────┘

[요한* 의 기자들은 같은 인물/집단이라고 상정하였다.]


의로써 의를 인정받는, 부어지는 은총 속에서 인간은 새로워지고,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서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복음5:8》




2017-03-19.


실제적인 칭의

바울서신에서 보이는 칭의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보이는 중생은 말만 다르지 같은 개념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변화를 맞이한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발상일까? 의인 몸에 접해있는 지체는 역시 의롭다. 아니, 의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의인은 말씀이기도 하다.


바울의 주장은 선언적인 것에서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것 까지 망라하는 것 처럼 보인다(즉각적인 의로움).

예수로 인하여[예수 안에서] 이미(지금) 의롭게 되었으니, 그렇게 의로워졌음을 믿고, 부합하는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

요한의 중생 역시 이렇게 말하는 것 처럼 보인다.

예수의 공로로써 (위로 부터)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제는 건강하다. 더이상 죄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의 중생과 바울서신의 칭의는 같은 개념이지 선후관계로 놓일 만한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용어가 그렇다고 해서 내용까지 그렇다고 보는 건 오해가 아닐까?


바울의 주장들을 실제적인 칭의와 선언적인 칭의로 각각 놓고 본다면, 전자가 훨씬 해석하기에 용이하고, 구도를 그릴 때도 더욱 단순하다. 개신교의 칭의론은 그 효용성이 분명있지만, 그렇게는 제대로된 바울을 읽어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울이 급진적인 종말론자였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장 오늘내일하며 세상이 뒤집어질텐데, '칭의-성화'의 단계적인 절차를 밟으며 나아간다? 그건 아무리 봐도 전혀 아닌 것 같다. 이런 식의 신앙은 현시대적인 교회의 신앙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그 때의 바울이 지닌 신앙과는 반드시 거리차가 있을 것이다.


칭의유보&소명탈락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고, 적어도 요한1서의 기자는 이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요한1서 2:27,28》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미래적인 구원 확신/담대함 및 부끄러움(실패)에 대한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