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으로 부터는 좋은 것[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율법은 피조물의 실수[죄]를 방지하기 위한 항목들의 나열이며, 그 내용이란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들과 피해야만 하는 것들의 집합체이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에는 공이 없다.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피해야만 하는 것에도 공은 없다. 더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는 것 자체는 선한 것과는 무관하다.
다만 어긋남으로써 망하는 인생들과 비교하여[구별되어]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망한다는 것은 율법 그 자체의 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나오게 되는 원목적인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에게 배푸는 자비와 사랑'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또 율법을 지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율법 그 자체의 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선한 의지에 부합하여 그의 목적을 함께 이루어 나가려는 바, 이에 힘입어 의롭게 됨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여기에 더하여 무엇을 하였나?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는 초인(신)으로써 보통인간(피조물)이 도무지 지킬 수가 없는 율법들을 모조리 지켜보여 그 구속을 풀었다지만,
예수는 초인으로서 일을 하고 돌아간 것이 아니며, 그는 보통의 인간을 떠나지도 않았다.
위의 주장을 따르면, 예수와 신약의 우월성을 강조하기에 아주 좋은 포지션을 만들어내겠지만,
필연적으로 신·구약의 분열을 야기하며, 면면히 이어오는 예수와 예언자들의 연속된 고리가 어그러지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는 초인 처럼 살지도, 초인으로서 죽지도 않았다.[그는 한 인간으로써 고난을 받다가 죽고 부활했다고 믿어질 뿐이다.]
그는 마땅한 걸 마땅하다 말하고, 더러운 걸 더럽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율법을 모조리 지켜내어 율법을 해체한 것도 아니고, 사악한 율법의 구속을 실 자르 듯 끊어낸 것도 아니다.
단지 그 것이 지녀왔던 가치를 말하고, 이를 훼손하는 인간(성)을 되짚은 것이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방법은 간이한 것이고, 그가 제시하는 바는 단순하다.
[율법은 거룩한 도구로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율법 자체의 얽매임과 이를 유용하려는 인간들로 부터도 벗어난다.]
그리고 그에게 힘입어 의롭게 된다는 것은, 그가 의롭다고 인정받았음을 믿는 것이며,
이 믿음을 통해서 그의 방법론(옷)에 충실히 의지함으로써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새로운 시작으로서, 다른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오래 묵었던 것의, 맛의 맛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덧. 예수가 대속하였던 죄라는 건 그가 지고 갔던 십자가로 상징된다.
죄 없는 어린양이라는 것도 다시 보자면 정치범으로서의 십자가 이야기고.
교회의 믿음에서는 이를 원죄와 결부시키지만, 여러모로 신화적인 표현에 가깝다.
예수의 십자가 이야기는 자뭇 의식적이다.
예수는 죄=십자가 에 매달려, 유대인의 왕으로서 등극하였고, 왕이라는 위치에서 하나님과 대면한다.
죄에 매달려 그의 존재를 알림과 동시에 자신을 매달고 있는 죄를 세상에 선보인다.
죄는 인간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데, 예수는 이 죄에 매달려 고통과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이 죄라는 건 사실상 만들어진 죄, 억지로 이름하자면 '없는 죄'다.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 선보인 것만을 두고서 단순하게 말하자면,
'죄 없이도 고통 받고 충분히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