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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평범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해지는.

앞에 글에 이어서 쓴다.

 

언젠가 부터 어떤 교우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소외 받고, 억압 받고, 고통에 겨운 사람들을 위해서 찾아왔다"는 식으로 가르키고 있던데, 그들의 성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째 점점 고착화되어 가는 것 같다.

 

때문에 이 글은 그런 식의 언더독한 사고 방식을 제거하는데 다소간의 목적을 가진다.

 


 

성경 속 구세주의 강림과 사역에는 다음의 두 가지 시선이 따르고 있어 보인다.

 

  1. 높은 자의 자비
  2. 평범화 내지 정상화

 

구제: 높은 자의 자비

먼저 높의 자의 자비 란, 쉽게 생각하자면, 전근대 시기 왕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자비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왕이 행차하다가 도탄에 빠진 백성이 다가와 '아이고, 왕이시여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요!'라고 했을 때, 자신의 백성을 성심성의 것 구해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냥 '저 사람 불쌍하니 도와야지'가 아니라, 시름에 겨운 백성을 왕으로서 굽어 살핀다는 것에 가깝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것과는 전히 다른 상황이다. 이 점에서  99 마리 양과 함께 한 마리의 양까지 구하겠다는 것을 같이 놓고 본다면 더욱 뜻이 분명해지는데, 그 것은 왕이 자기 백성에게 보증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다.

 

혁명가 예수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런 예수의 구제를 두고서 약자와 엮기를 좋아하지만, 당장 그가 친히 뽑은 12사도만 봐도 그저 약자니 소외자니 하는 말이 나오기 힘들다. 복음서의 전체적인 테마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불운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과 민족을 구하는 것이 골자이고, 그 행적 자체는 시대의 메시아를 그리고 있다.

 

복음서는 어느 사회 운동가의 혁명기가 결코 아니다.

 

치병: 평범화 내지 정상화

나는 이전에 평범함과 특별함을 잠시 대비했었는데, 이 특별함에는 항상 멋지고 잘난 것 만이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시선에는 '특별한 쓰레기', '평범하지 않은 불량품'이라며 피하거나 격리시키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낮은 곳에 내려와서 고통받고 소외된 자들 위주로 주목한다는 구세주가 아니라
좀 더 평범한, 그런 장소와 사람 사이에 머무는, 하나님을 보고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구세주의 치병행위란, 평가절하된 쓰레기를 평범하게 되돌리는, 불량품을 양품으로 정상화시키는 작업 또는, 그러한 약속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간단하게 말하자면, 병의 치유는 건강해지는 것인 즉, 장애를 제거하고 평범하게 정상화 되는 것이고,

 

이렇게 마련된 평범함 앞에서, 게으른 특별함은 뒤로 나가떨어지고, 부지런한 평범함이 첫 번째로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같이보기

 

평범하고 평범한 그래서 거룩한.

사람들에게서는 그 자신의 종교성이 드러날 때, 성스럽거나 비일상적이거나 혹은, 다른 것과 구분되는 어떤 상징 같은 것들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되려 평범하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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