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끔일지/메모장

율법의 무게

바울이 율법-복음이란 구도로써 대립적으로 사용하고 부터, 율법을 마치 쓰레기 처럼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편견일 것이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들의 조언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토라 안에 그의 기쁨이 있어 그의 토라를 밤낮으로 읽는 자다.

그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그 때에 따라 그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안는 것처럼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성공할 것이다.


율법이 정녕 인간을 짓누르는 굴레였을 뿐이라면, 이로 부터 기쁨·즐거음이 있으며 또 좋아한다는 말은 나올 수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른바 율법을 좇는다는 사람들은 M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율법은 방황하는 인간들에게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지침서 혹은 지표에 가까울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제시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마음의 안정을 누리게 하는 효과도 줄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율법이 무거웠던 이유는 그 가짓수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율법은 법의 일종이며, 법이란 분쟁이[문제가] 있는만큼 그 수가 있을 수 밖에 없다(각종 의례·규범 등).

당연한 걸 이상하게 보면 안된다. 다만 후대로 갈 수록 점차 이상한 방식·허식들이 생겨나긴 했다.


율법이 무거웠던 진짜 이유는, 여기에는 돈이 들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는 대는 돈이 필요하다.

[예수가 성전(의 상인들)을 정화하고, 과부의 헌금을 예로 들며, 가난한 자를 찾아다녔던 등등의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겠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대 돈이 든다?

돈은 언젠가 부터 하나님전의 문지기가 되었고, 돈이 먼저고 주님은 나중이 되어버렸다.


누구는 돈이 있어서 날마다 용서를 받는데(?), 누구는 돈이 없으니 숨만 쉬고 살아도 죄가 쌓인다.


이란 바,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고 할만 했던 것이다.



덧.

때문에 신약에서 제시되는 '값 없이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란 건,

율법이란 '행위'적 구원론과 대립하는 은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 즉 실제로도 돈이 들지 않는[무상인] 은혜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무료로, 자유롭게' 배풀어지는 은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