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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예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지, 죄인을 '만들어서' 부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피조물에게는 본디 죄가 없다. 다만 죄가 있다면, 죄가 없는데 있다고 정죄하는 죄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좋은 법을 주어도 이를 가지고 죄인을 만들고, 좋은 말을 주어도 또 죄인을 만들어 놓으면서, 끊임 없이 죄의 전가를 반복하고 있다고 할 만하겠다.


"너는 죄인이 아니다." 이 말이 나오기 까지가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까지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말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한 9:2,3》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중략)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요한 9:24-3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모세가 다음과 같이 답한다면,


Q: 사람이 왜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A: 죄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Q: 사람이 왜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A: 할 일(소명)이 있기 때문이다.


묵은 것과 새로운 것의 차이는 근본적인 시점의 차이와 같다. 전제[전통]를 밀고 나가느냐, 뒤집어 엎느냐의 차이다(예수는 둘 다 보장한다). 그래서 빌라도가 한 다음의 말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루카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인간에게는 본디 죄가 없다. 다만 죄가 있다면, 죄가 없는데 있다고 정죄하는 죄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애시당초 무죄한 인간을 두고서 용서하고 말고가 없는 것이며, 예수의 행적 속에서 용서란 건 사실상 그 것이 알아듣기도 말하기도 쉽기 때문이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르코 2:9-11》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이는 그가 보여주는 대속의 개념도 마찮가지다. 물론 십자가 사건은 보다 많은 것들을 보여주지만, 기본적인 개념에 있어서는 앞서서 드러낸 죄의 용서와 크게 다르지가 않다.


인간은 처음 부터 하나님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 낙원에서 쫓겨났다지만 이 것이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피조물이 그의 은혜 가운데 머무르는 이상,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계는 지속되는 것이다. 때문에 아는 바와 모르는 바가 있을 뿐, 누구나 그의 뜻을 행하게 되는 것이며,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통하여 그 작은 차이가 나타난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29-37》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가 자신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냥 두라고 한 건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처음 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며, 그들 가운데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가 있게 된다.


부인, 이제 내가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요한2 1: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죄 대신 할 일을 주었다. 이를 통해서 피조물을 자신과 같이 만들려고 하는 건, 그가 세상을 사랑하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으니, 영원함은 완전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덧.

바울: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예수: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바울은 자기 자신에게 맞는 신학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