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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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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몽 삼매니 집중이니 하는 식으로 만난다는, 고차원적인 참나(진아)에는 좀 문제가 있다. 먼저 그 것이 참나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 것이 나인지 아닌지는 사실상 기존의 나(거짓나)와 대비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주장에 따른다면,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면 기존의 나를 벗어난 '진정한 나'를 깨닫게 된다지만, 거기에 있는 것이 내가 되기 위해선, 그 당시가 아니라 그 때를 지나서야만이 '그렇다'고 말할 수가 있게 된다. (원래 이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쉽게 말하자면 호접몽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하지만 내가 나비인지 아닌지를 묻기 위해선 먼저 깨어날 필요가 있으며, 그 뒤에 깨어난 나와 꿈속의 나비를 대비하고 난 뒤에서야, 그 것이 '지금의 ..
영혼 이것저것 혹자는 영혼에 위계를 두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저수준-고수준이니, 1단계-2단계-3단… 머 이런 식? 옛 사람들은 구분은 대개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육체: 가시적, 물질적, 만질 수 있는 부분. 정신: 비가시적, 비물질적, 의식할 수 있는 부분.영혼: 초가시적, 초물질적, 경계를 벗어나 있는 것.[그냥 '초-'만 붙여보았음.] (사람에 따라 다름). 그리고 보통 영혼이라 말하는 부분은 의식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가 몽땅 들어가는 있는 듯 하다.요즘으로 친다면, 꿈과 같은 비의식(무의식)의 부분을 영혼이 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어… 위의 말이 좀 어폐가 있긴한데, 옛 사람들에게 영혼이란 생명의 근본과 같았다. 즉, 지금은 '육신의 내'가 '뇌라는 장기'를 사용하여 나를 움직이고 생각하고..
나(영혼) 시각이 있으면 볼 수가 있고, 청각이 있으면 들을 수가 있다.같은 방식으로 자각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알 수가 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시각적 대상은 눈을 의지하여 볼 수가 있는 것이고, 청각적 대상은 귀를 의지하여 들을 수가 있는 것이며, 자각적 대상은 정신을 의지하여 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눈을 떳다가 감으면 사물이 보였다 사라지는 것 처럼,귀를 열었다가 닫으면 소리가 들렸다 사라지는 것 처럼,생각을[정신 작용을] 했다가 멈추면 내가 있다가 사라진다. 눈을 감았다고 보이던 사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귀를 닫았다고 들리던 소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 처럼,생각을 멈춘다고 있었던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각기로 보기 전에 먼저 대상이 있고,청각기로 듣기 전에 먼저 소리가 있는..
사투리적인 발음 및 들림 막귀로 가늠하는 사투리의 발음들. 오류 있음. ㅗ : '오'라고 발음/들림.ㅜ : '우'라고 발음/들림.ㅏ : '아'라고 발음/들림.ㅓ : '어'라고 발음/들림.ㅚ : '외'라고 발음/들림.[입을 오므리고, '에'라고 발음하는 소리임.]ㅟ : '위'라고 발음/들림.[입을 오므리고, '이'라고 발음하는 소리임.]ㅐ : 입을 자연스럽게 벌리고, '외'라는 감각으로 발음.['에'와 '외'가 동시에 들리는데, 그 것들 보다는 좀 낮으면서 말려들어가는 듯한 소리임.]예전에 입을 좌우로 평평하게 벌리고 어쩌라고 배우긴 했는데, 표준어의 정석일지는 몰라도, 평소에는 그렇게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ㅔ : '에'라고 발음/들림.ㅡ : '으'라고 발음/들림.ㅣ : '이'라고 발음/들림.ㆍ : 'ᄋᆞ'라고 발음?['오..
동국정운의 병서 활용법 동국정운에서 맑은소리와 흐린소리의 구분을 위해서 병서를 활용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즉, 병서를 활용한다면, 이상적인 형태 안에 현실적인 정보를 포함시킬 수가 있다. 다음과 같은 예문이 있다. 二ᅀᅵᆼ〮時씽 三삼十씹〮分분 이 것은 이렇게 읽힐 수가 있다. ɲ̟͡ʑi.zi sɐm.zip̚.pun [이하 성조는 고려치 않음.] 하지만, 당대나 지금이나 한국어는 맑은소리-흐린소리의 대립이 내세우는 언어가 아니다.따라서 이상적으로 만들어진, 위와 같은 표기법과 독음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정음을 사용하면서, '병서 → 흐린소리'라고 정의한다면, 이 문제로 부터 한 발 비켜가며,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게 된다. 二ᅀᅵᆼ〮時씽 三삼十씹〮分분 (이상) ᅀᅵᆼ〮 싱 삼 십〮 분 ..
靈의 표현 내 근본을 性靈이라 일컫는다면, 이 靈은 하나일까 여럿일까?[앞선 포스팅을 따른다면 性神. 차후에 정리할 필요가 있을 듯.] 만일 각 개체마다 靈이 주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 것은 여럿이라고 할 만하다.반대로 개체 초월적인 대상을 天이라고 한다면 그 것은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天 = 靈 = 氣"의 관계 중, 天(한울)-靈(성령)은 하나-여럿이라는 관계로 맺어지며, 이 것은 수운-해월-의암-춘암으로 이어지는 동학-천도교의 내적 구조다. 반면, 내가 생각하는 수운의 초기 아이디어는 "天 ≠ 靈 = 氣"라고 생각되고,하나-여럿은 靈 자체에서 분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그렇다면 이 靈이라는 것은 天의 소산이면서, 그 것의 가장 가까운 지시자가 된다. 즉, 강령 있음(하나, 靈)은 곧, 지기금지(여럿,..
동학/천도교의 神·靈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기본어? 중심어? 아무튼. 내유신령(內有神靈)의 신령에 대한 근간어(?)는, 영(靈) 보다는 신(神)이 될 것 같다. 논학문에서는 다음의 용어들을 볼 수가 있다. 氣化之 神 接靈之 氣 《東經大全, 論學文》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유신령의 신령 → 神(강령 있음, 강령은 곧 지기금지)외유기화의 기화 → 氣(조화 있음, 조화는 곧 무이이화) 수운은 다음과 같이 용어를 변용한 것 같다. 강신(降神) → 강령(降靈) 접신(接神) → 접령(接靈) 동학-천도교에서는 (내부적인 해석은 잘 모르겠지만) "✕靈"이란 단어들(신령, 허령, 천령 등)로 부터 이끌려나오는 것들을 통틀어서 영(靈)이란 단어로 개념화하는 것 같다. 그래서 "천(天)은 곧 영(靈)"이 되며, 다음과 ..
예수의 공동체 누가 하나님의 곁에 서는가? 가난한 사람? 아니다부유한 사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함이 부유함 보다도 우위에 있는 때는,상대적으로 좀 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의 가치를 가졌을 때 뿐이다. 예수의 공동체는 부유함을 순환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다(부유함은 물질만이 아니다).그래서 내가 내놓은 만큼(혹은 더 크게) 나중에 다시 돌려받는 것이며,돌려 받은 것 역시도 잠시 머무르다가 또 다시 흘러가야만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 되고,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는 계속해서 순환한다.또한, 처음인 사람은 나중이 되고, 나중인 사람은 처음되는 것이며, 이 역시 계속해서 자리를 맞바꾸며 나아간다.(※ 복음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