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니 집중이니 하는 식으로 만난다는, 고차원적인 참나(진아)에는 좀 문제가 있다.
먼저 그 것이 참나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 것이 나인지 아닌지는 사실상 기존의 나(거짓나)와 대비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주장에 따른다면,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면 기존의 나를 벗어난 '진정한 나'를 깨닫게 된다지만, 거기에 있는 것이 내가 되기 위해선, 그 당시가 아니라 그 때를 지나서야만이 '그렇다'고 말할 수가 있게 된다.
(원래 이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쉽게 말하자면 호접몽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하지만 내가 나비인지 아닌지를 묻기 위해선 먼저 깨어날 필요가 있으며, 그 뒤에 깨어난 나와 꿈속의 나비를 대비하고 난 뒤에서야, 그 것이 '지금의 나와 엮여있다'라고 연관지을 수가 있게 된다.
고차원에 속한다는 참나 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내가 참나인가? 참나가 나인가?" 머, 장자가 나비였다면, 글도 남기지 못하고, 꿀만 빨다가 걍 죽었을 것이니 물을 것도 없겠다.
또한, 지금의 나와 대비하고서야 바로 알게 된다는 점에서 참나라는 건 기실, 내게 의지하고 있는 무언가에 지나지 않기에, 그 것은 결코 나를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기존의 내가 없이는 제대로 드러나지도 못하는 나라면 그 것이 어떻게 진정한 내가 될 수 있을까? 그러한 발상은 현실적이기 보다는 그저 원리적인 설정에 가까운 것이다.
때문에 따지고 들어간다면, 내가 사라질 경우 참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사라지면 그 참나도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옳겠다.
내가 볼 때, 이런 것들은(참나 체험 따위) 인간의 체험적 경험을 너무 고평가하고서 얻어진 산물에 가깝다. 전에도 말했던가? 그런 것들은 뇌에 전기자극만 주어도 얻어질 수가 있다고. 그럼 전기자극은 고차원으로 가는 천국행 열쇠인가? 설마……;
반면, 현실 속에서도 어울릴 수 있는 참나가 있다면 그 것은 좀 더 형편상 낫다. 최소한 깨어있긴 하니까(착란적 요소도 좀 더 적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