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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예수의 공동체

누가 하나님의 곁에 서는가?


가난한 사람? 아니다

부유한 사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함이 부유함 보다도 우위에 있는 때는,

상대적으로 좀 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의 가치를 가졌을 때 뿐이다.



예수의 공동체는 부유함을 순환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다(부유함은 물질만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내놓은 만큼(혹은 더 크게) 나중에 다시 돌려받는 것이며,

돌려 받은 것 역시도 잠시 머무르다가 또 다시 흘러가야만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 되고,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는 계속해서 순환한다.

또한, 처음인 사람은 나중이 되고, 나중인 사람은 처음되는 것이며, 이 역시 계속해서 자리를 맞바꾸며 나아간다.

(※ 복음서의 비유와는 다른 이야기로 어디까지나 차용한 바임. 가난하다는 것 또한 하류인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


이른바 자발적인 가난 속에서 맘몬이 머무를 틈이 없게 된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다.


즉, 이러한 방침의 기반이 되는 강한 믿음(신앙)과 함께 유효한[유의미한] 법(규칙)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가 제시하는 신성한 법인 율법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결속이란 측면에서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의 완성이란 건 공동체의 완성과 같다.

그리하면 율법은 분명하게 생명을 주는 법이며, 죽이는 법이 아니라 살리는 법이 된다.


또,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산상수훈에서 나오는 말들의 대상은

율법학자들이 타겟이 아니라 정말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만 한다"에 가깝다.


왜? 실질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태동하는 공동체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기 까지는

어느 정도의 강력한 제재가 필요할 수 있으며, 예수는 이러한 측면에서 도덕적인 자세를 요청하였을 것이다.



예수의 공동체를 현시대에 적용할 수 있을까? 음… 아마도 힘들 것이다.

[달리 보자면 예수의 공동체는 시대별로 어느 정도씩은 꾸준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면 예수와 바울의 차이란, 태동하는 공동체와 유지[성립]되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이미 다르다.


만약 예수의 공동체가 다시 온다면, 그 것은 큰 충격으로 현 사회가 박살났을 경우라면 혹, 유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

시선강간(?) 운운하며 예수의 가르침을 끌어들이는 주장이 있지만,

미친 소리는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예수는 일반적인 의미로서 벌어질 수 있는 죄 자체를 차단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뒤 구절이 다 그런 모양새라고.


덧붙이자면,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더러운 것이란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니,

죄라고 불리는 것들은 몽땅 그런 식으로 말해질 수가 있다.


마음불효, 마음강도, 마음살인, 마음도둑질, 마음…;;


또한 마음-눈-손의 단계적인 언급을 본다면,

이는 죄의 현실화 또는, 그 위상(?)을 가리키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