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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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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관 전적 부패라는 세계관은 항상 흥미로운 관점이다. 뭐, 흥미롭다고 해서 이 개념이 매우 신선하거나 자극적이라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그 사고방식이 한 때 교회에서는 꺼리면서 경계하였던 영육이원론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좆망하여 썩어버렸지만, 구원자는 언제나 청정하고 영화롭기 그지 없다.[물론 전적부패론 은 과거의 그들과 달리 물질(육신)을 두고서 불결함을 느끼면서 혐오하는 것 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마치 오래된 유물을 만나는 느낌이랄까? 하여간 그렇다.[재밌게 보인다.] 그러나 전적 부패라는 건, 무대 위의 설정(세계관) 처럼 여건이나 계기로써 써먹기에는 좋을 수 있겠지만,이 것으로 이야기(사건) 까지 전개하려 드는 건 다소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A: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아무 것도 할 수 ..
칭의확정파?(약화된 구원파) 전통적인 칭의론을 보면서… 본인들은 부정하겠지만,내 시선에서 그들이란, 약화된 구원파 처럼 느껴진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결단과 사랑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구원파.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결단과 사랑으로서 구원 받는다는 칭의확정파? 저들은 무상 혹은 공짜를 좀 좋아하는 것 같지만, 나는 이 말이 절로 떠오른다.[앞문장은 뺐다;;]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중략)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복음 25:26,27,30》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
칭의는 선결조건인가? 나는 칭의가 형식상 선행적으로[선언적으로만] 놓여진다는 점을 일단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상기의 전제를 따라서 '의인이면서 죄인' 같은 모순되는 논지가 사용되지만, 아무리 봐도 철퇴를 맞지 않고 지금 까지 버티고 있는 게 용해 보인다. 예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일단 성경에서는 의인과 죄인을 혼용한 적이 없다. 죄인이면 죄인이고, 의인이면 의인이다. 또한 적어도 예수나 바울의 언행을 따른다면, 칭의란 결과로서 부여받는 형태일 뿐이지, 이 것을 조건삼아 전개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의 예를 본다면, 그가 의롭다고 인정 받은 것은 소명을 받은 뒤, 약속이 이루어질 동안 믿음을 지킴으로써[하나님의 말씀에 속해(참여)있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것이고, 예수 역시 제시된, 구원자로서의 약속에 대한 사역을..
의인의 부활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의로움을 보장하기 위하여 주어진[제시된] 것이며,그의 의를 전가 받는 이들(혹 어쩌거나한 이들도 포함) 역시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는게 교회의 신앙. 하지만 세간에서 말해지는 예수의 부활이란, 그저 누군가의 짧막한 저승/죽음 여행 처럼 그려지고 있다.그리고 교회는 부활을 예수(하나님)의 신통한&전매특허 기적인양 팔고 있고… 아니, 신통한 건 맞긴한데;; 그리 파는 건 전도된 거다. 더군다나 후대로 오면서, 좋은 의미로 그런 것일 테지만, 이런저런 설이 붙어버린 통에오히려 원의미를 해치거나 가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모세의 방법, 예수의 방법 율법으로 부터는 좋은 것[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율법은 피조물의 실수[죄]를 방지하기 위한 항목들의 나열이며, 그 내용이란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들과 피해야만 하는 것들의 집합체이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에는 공이 없다.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피해야만 하는 것에도 공은 없다. 더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는 것 자체는 선한 것과는 무관하다.다만 어긋남으로써 망하는 인생들과 비교하여[구별되어]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망한다는 것은 율법 그 자체의 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율법이 나오게 되는 원목적인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에게 배푸는 자비와 사랑'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또 율법을 지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율법 그 자체의 선함에 있는 것..
聖父·聖子·聖身 성부(聖父)·성자(聖子)·성신(聖身)은 현무경의 병세편에 나오는 글로써,증산이 종종 하던 대로, 그리스도교의 성삼위를 자기 스타일로 바꾼 것이데, 그 내용이나 하는 말들은 잘 모르겠고, 단지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성신(聖身)'이라는 표기에 눈이 가기에 생각했던 것이다. 증산은 신명을 참 좋아라 하는데,-_-a 굳이 성신(聖神)을 변형하여 성신(聖身)으로 쓴 이유가 무얼까? 쭉 생각해 보니, 이 건 불교의 삼신불을 보는 것과 같은 감각으로 성삼위를 살짝 손보았거나 그렇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이렇게 보는 것 같다.] 성부(聖父) ← 법신(法身) : 상제의 본체 및 원리.성자(聖子) ← 보신(報身) : 상제의 작용 혹 성품.성신(聖身) ← 화신(化身) : 상제의 현신 즉, 아마도 증산 ..
신종교의 삼교 삼교합일 운운함이 있는 건, 시대 속에서 서로 간의 영향을 주고 받은 점도 있지만,그 것들의 태생이 중국제 즉, 메이드 인 차이나이기 때문이다.중국{유교, 불교, 도교}. 현대 한국에서도 비슷한 케이스가 있다고 보여지는데,동학-천도교증산X(X는 특정하기 힘들어서…)원불교 물론 저 셋이 유불도(선) 세 가지와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건 아니나원불교를 놓고 보았을 때, 유교·도교·서학의 지분을 높이면 동학-천도교로,무속·도교·기이함(?)의 지분을 높이면 증산X로 변환시킬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원불교가 나중에 등장하면서 앞선 사상들의 특징을 수용한 결과겠지만,기능적으로 접근한다면, 원불교를 징검다리 삼아 오락가락해볼 여지가 있겠다는 것. ※ 대종교는… 대종교는 그냥 도교인 것 같다. 완전히 한국화된 도교 혹은 ..
신적 간극 동학-천도교를 생각해 보다가 적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심연 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리하는 작용을 하지만,다른 측면에서는 상호간의 구분을 좀 더 분명하게 만들어주며, 경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분명하게 대립할 수록 대상이 분명해지고, 사람은 자신의 입지를 재설정하게 된다. 물론 항상 심연 만을 강조하는 건 아니다. 심연을 말하는 한 편, 형상과 에너지(혹은 내재적일 수 있는[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이 간극을 매우려고 하는데,각각 예수와 성령이다. 특정 종파라면 성물을 활용하기도 한다. 비단 그리스도교만 이러한 것이 아니다. 대상이 분명한 만큼 이를 매우고자 하는 시도는 항상 있어왔다. 불교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