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ㅿ의 등장과 퇴장 2020-09-30 추가사항: 유비음? 무비음? 비음 기준으로 보는 자소분류 이 글은 항상 그렇듯, ㅿ에 대한 상상물이다. 상상하기 전에 두 가지를 전제한다. 고대 부터 현대 까지, 한국인들은 [z/ʑ] 음가에 대한 개념이 없다. 고대 부터 현대 까지, 한국어는 구개음화를 겪어오고 있다. ㅿ의 등장 파생적 등장(2020-09-26) 전제는 한국어는 고대 부터 주변 언어(일본어나 중국어)와 달리 유성 치경* 마찰음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별도의 훈련이 없는 순수한(?) 현대 한국인들의 언어 감각에서는 [z/ʑ]가 대체로 [d͡z/d͡ʑ](치경* 파찰음)으로 받아들여지지 도무지 마찰음 [s/ɕ]과 같은 계열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ㅅ의 유기음 설이 있지만). 그렇다면 ㅿ는 대체 어떻게 나..
평범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해지는. 앞에 글에 이어서 쓴다. 언젠가 부터 어떤 교우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소외 받고, 억압 받고, 고통에 겨운 사람들을 위해서 찾아왔다"는 식으로 가르키고 있던데, 그들의 성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째 점점 고착화되어 가는 것 같다. 때문에 이 글은 그런 식의 언더독한 사고 방식을 제거하는데 다소간의 목적을 가진다. 성경 속 구세주의 강림과 사역에는 다음의 두 가지 시선이 따르고 있어 보인다. 높은 자의 자비 평범화 내지 정상화 구제: 높은 자의 자비 먼저 높의 자의 자비 란, 쉽게 생각하자면, 전근대 시기 왕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자비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왕이 행차하다가 도탄에 빠진 백성이 다가와 '아이고, 왕이시여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요!'라고 했을 때, 자신의 백성을 성심성의 것 구..
평범하고 평범한 그래서 거룩한. 사람들에게서는 그 자신의 종교성이 드러날 때, 성스럽거나 비일상적이거나 혹은, 다른 것과 구분되는 어떤 상징 같은 것들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되려 평범하기 때문에 더욱 거룩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 이 것은 '일상적인 것이 거룩한 것이다'라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평범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만찬 지금의 교회의 성만찬은 전례 즉, 종교 예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구교나 신교 모두 마찮가지다. 개신교의 경우 간소화되었다지만 역시 교회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시간을 정해 행해지는 예배 겸 예식이다. 하지만, 사실 주님의 만찬은 회당에서 드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냥 식사를 같이 한 것 뿐이다. 물론 시기적으로 큰..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어묵동정 어묵동정(語默動靜) 먼저 어묵동정을 말하자면, 불교 용어로써 행주좌와 어묵동정으로 무시선과 같은 선의 일상성을 말하는 것이나, 동학-천도교에서 이를 차용하여 쉼 없는 하느님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변용하였다. 行住坐臥語默動靜 何莫非天地鬼神造化之跡 행주좌와와 어묵동정이 어느 것이나 천지귀신조화의 자취아님이 없건마는 이에 나는 이를 다시 차용한 뒤, 살짝 비틀어서 행위자의 상태 용어로서 다시 정의하되 마음아룀과 엮었다.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語: 말함. 默: 고요. 動: 움직임. 靜: 멈춰짐(멈춰 있음). 이렇게 마련된 4가지 상태는 서로 관계될 수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語動: 행위자가 말 즉, 목표 및 논리성을 가진채 움직이는 것이다. 默動: 행동이 말로 표현되지는[구성되지는] 않으나 그 행위(현상)..
빙의혐오 — 피해자빙의 중심적 공갈성 정신착란 언젠가 부터 유행하고 있는 XX혐오에 무슨 이름을 붙이면 좋을까하며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빙의'라는 말을 붙이니 의미가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개요 빙의혐오(빙혐)이란 피해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피해자인양 행세하는, 혐오를 중심으로 짜여진 감성팔이의 일종으로, 강한 공격성과 적개심을 수반하는 정치질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 혐오는 빙의자(?)의 망상적 피해의식을 크게 자극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혐오에 미쳐있는 상태지만, 자신과 그 무리는 혐오를 배격하는 투사의 이미지를 둘러쓰기 때문에 '이 것은 정당한 분노'라는 착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여성혐오 이번엔 이 유형에 있어서 대표적인 여성빙의혐오에 대해서 알아보자. 종종 들어봤을 것이다. 여.성.혐.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남자들의 답변은 대부분 다음과..
논리적인 아픔 — 복음과 신학 논리로 아플 수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논리 자체는 아픔도 아플 만한 것도 없지만, 하지만 어떤 논리의 사용자들은 그 논리로 인하여 때때로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아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사고를 따라서 흘러간다. 내가 느끼는 장로교단의 칭의론은, 이리 전개되어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어디서 부터 잘 못 된 것일까? 칭의론을 살펴볼 때, 다음의 두드러진 경향성을 만날 수가 있다. 바울 서신과 복음서 간의 극단적인 비중 차이 예정에 대한 극도의 의존성 무용지물이 되버리는 복음 성경은 통합적으로 보아야 한다지만, 이 칭의론만 등장하면 없던 일이 되버린다. 놀랍게도 바울의 언사는 전면에 서지만, 예수의 발언은 칭의에 대해서 그 어떤 영향도 없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인용한..
맡겨진 선(善) — 구원확신과 행위공로 본문에서의 전제: 완전한 타락, 예선적 견인(預善的 또는, 예언적-), 유보적 칭의. 행위와 믿음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사람들은 행위는 행위, 믿음은 믿음이라 말하지만, 실은 믿음도 행하는 중에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러한 바를 일러 '신앙행위'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은 신앙을 자랑하고 확신하는 것이지, 행위를 자랑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실은 말장난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에 행위와 믿음을 가르는 건, 그저 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에, 추가로 '공로'라는 개념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게 되지만, 그건 직접적인 설명이였기 보다는 반대를 위해 사용되던 개념이었을 뿐이다. 이제 내가 볼 때, 여기서의 핵심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한 기조인 것이며, 그 것은 결국 구원을 위한 선(善)..
분할수면과 시간전례 요즘 잠을 어떻게 잘까로 여러가지 생각하다가 '혹시 잠도 나누어 잘 수 있지 않을까?'하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해서 찾아보니 이른바 분할수면(다상수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더불어서 이와 연관된 한가지 의문이 풀렸다. ※ 다상수면이 제대로된 수면방법인지에 대한 건 논란 있음.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에는 역사적으로 시간전례 또는 매일전례라는 것이 있다. 그 중 정교회의 편성표(?)를 보면 다음과 같은데, 만과(저녁기도) 석후과(제1밤기도) 심야과(제2밤기도) 조과(아침기도) … 등 이중 위의 2·3항에 대한 정교회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전략) 석후과는 저녁 식사 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드리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세가지 주제에 초점을 둡니다. 먼저 지나간 하루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