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 (6) 썸네일형 리스트형 논리적인 아픔 — 복음과 신학 논리로 아플 수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논리 자체는 아픔도 아플 만한 것도 없지만, 하지만 어떤 논리의 사용자들은 그 논리로 인하여 때때로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아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사고를 따라서 흘러간다. 내가 느끼는 장로교단의 칭의론은, 이리 전개되어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어디서 부터 잘 못 된 것일까? 칭의론을 살펴볼 때, 다음의 두드러진 경향성을 만날 수가 있다. 바울 서신과 복음서 간의 극단적인 비중 차이 예정에 대한 극도의 의존성 무용지물이 되버리는 복음 성경은 통합적으로 보아야 한다지만, 이 칭의론만 등장하면 없던 일이 되버린다. 놀랍게도 바울의 언사는 전면에 서지만, 예수의 발언은 칭의에 대해서 그 어떤 영향도 없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인용한.. 요상한 칼럼 오랜만에 어떤 칼럼을 보니 이런 글이 써있더라. 또 정말 구원 상실이 가능하다면, 구원받는 것은 누구 덕분이고 상실하는 것은 누구 탓인지, 예컨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 덕분이고, 구원 상실은 인간 탓인지 듣고 싶습니다. 만일 '인간 탓(because of man)'으로 '하나님 덕분(by virtue of God)'에 얻은 구원을 잃게 된다면, '구원하는 하나님 능력'보다 '구원을 잃게 하는 인간의 능력'이 더 강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약하고서야, 어떻게 시작부터 종말까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필자는 칼럼도 꾸준히 쓰고 있던데, 지금 까지 쓴 건 대체 뭐였을까? 질문의 주제는 칭의유보적이라고 하면서, 내용 전개와 결론은 확정적인[법정적인] 칭의 관념에서나 .. 어떤 뽕 어떤 이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불안과 두려움에 떨면서다른 사람들에게는 왜 그렇게 살아가냐고 묻는다. 그런데 정말로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쪽이 아니라 그쪽일 것이다. 본인들은 두려움을 떨치고서 진정한 기쁨의 소유자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다른 주장의 세례를 받으면 언제 기뻐했냐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때론 폭력적인 모습이(?) 되버리기도…] 이건 마치 약쟁이가 약으로 즐거워하다가약발이 떨어지니 부들거리는 모양새와 별 다를 것이 없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두려움을 떨친 것이 아니라 단지 덮어두고 있는 형태에 가까워서본인들의 갈망을 충족하는 주장이라면 대환영이지만,그렇지 못하면 감춰둔 두려움이 올라오는 즉,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다. 또, 그들은 두려움을 이미 물리쳤다는 전제를 깔고 가므로덮어둔.. 구원론=윤리론이란 발상 교회에서 주장하는 전통적인 구도란 '은혜(믿음)-행위(정성)'의 이원 구도이고,이는 '신본-인본'이라는 이원론적인 관점으로 부터 도출된다고 볼 수 있다. 나열한다면 다음과 같다. 신본 - 하나님의 은혜 ← 믿음.인본 - 사람의 행위 ← 정성. 그리고 이 구도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다음과 같이 만들어 진다. 존재론 → 윤리론[근데 이러한 형태를 어딘가에도 본 적이 있다? 음, 아마도… 성리학?] 즉, 전통적인 교회[일부 개신교회]의 구원론 이란 '존재론으로 부터 유추(유비)되는 형태를 취하는 윤리론'이라고 볼 수 있겠고,여기에 의거한 성경 해석을 이름한다면, '윤리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 교회의 교조주의적인 면모는 성리학의 교조주의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구.. 칭의확정파?(약화된 구원파) 전통적인 칭의론을 보면서… 본인들은 부정하겠지만,내 시선에서 그들이란, 약화된 구원파 처럼 느껴진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결단과 사랑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구원파.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결단과 사랑으로서 구원 받는다는 칭의확정파? 저들은 무상 혹은 공짜를 좀 좋아하는 것 같지만, 나는 이 말이 절로 떠오른다.[앞문장은 뺐다;;]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중략)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복음 25:26,27,30》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 칭의는 선결조건인가? 나는 칭의가 형식상 선행적으로[선언적으로만] 놓여진다는 점을 일단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상기의 전제를 따라서 '의인이면서 죄인' 같은 모순되는 논지가 사용되지만, 아무리 봐도 철퇴를 맞지 않고 지금 까지 버티고 있는 게 용해 보인다. 예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일단 성경에서는 의인과 죄인을 혼용한 적이 없다. 죄인이면 죄인이고, 의인이면 의인이다. 또한 적어도 예수나 바울의 언행을 따른다면, 칭의란 결과로서 부여받는 형태일 뿐이지, 이 것을 조건삼아 전개되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의 예를 본다면, 그가 의롭다고 인정 받은 것은 소명을 받은 뒤, 약속이 이루어질 동안 믿음을 지킴으로써[하나님의 말씀에 속해(참여)있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것이고, 예수 역시 제시된, 구원자로서의 약속에 대한 사역을..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