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6) 썸네일형 리스트형 율법/양심 그리고 복음 행위라는 측면으로 부터 계속해서 조명해나간다면, 더이상 믿음과 행위를, 단순 대비시키기는 어려워 질 것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예수와 바울의 율법관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예수와 바울의 입장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막 써 재꼈다. 그래서 간단하게 언급한다면; 바울: 율법이란, 죄를 드러내는 도구와 같다. 그래서 나쁜 것을 피할 수는 있지만, 좋은 것을 내놓지는 못한다. 때문에 의로움을 위해서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요청이 필요해진다. 예수: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에서는 차이가 있어보인다. 공관복음: 바울과 달리 율법에서도 최소한의 좋은 것이 나올 수가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것은 복음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좀 많이 감상적인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예수의 공동체 누가 하나님의 곁에 서는가? 가난한 사람? 아니다부유한 사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함이 부유함 보다도 우위에 있는 때는,상대적으로 좀 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의 가치를 가졌을 때 뿐이다. 예수의 공동체는 부유함을 순환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다(부유함은 물질만이 아니다).그래서 내가 내놓은 만큼(혹은 더 크게) 나중에 다시 돌려받는 것이며,돌려 받은 것 역시도 잠시 머무르다가 또 다시 흘러가야만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 되고,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는 계속해서 순환한다.또한, 처음인 사람은 나중이 되고, 나중인 사람은 처음되는 것이며, 이 역시 계속해서 자리를 맞바꾸며 나아간다.(※ 복음서의.. 율법의 무게 바울이 율법-복음이란 구도로써 대립적으로 사용하고 부터, 율법을 마치 쓰레기 처럼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편견일 것이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 모세의 방법, 예수의 방법 율법으로 부터는 좋은 것[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율법은 피조물의 실수[죄]를 방지하기 위한 항목들의 나열이며, 그 내용이란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들과 피해야만 하는 것들의 집합체이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에는 공이 없다.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피해야만 하는 것에도 공은 없다. 더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는 것 자체는 선한 것과는 무관하다.다만 어긋남으로써 망하는 인생들과 비교하여[구별되어]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망한다는 것은 율법 그 자체의 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율법이 나오게 되는 원목적인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에게 배푸는 자비와 사랑'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또 율법을 지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율법 그 자체의 선함에 있는 것..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고대의 법률들과 비슷하게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보상은 같은 부류로 처리한다.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한다.때문에 율법주의로 정죄하여 고통을 주었다면, 동일하게 율법주의로 판별받고 고통받아야만 한다.보상은 같은 선상에서 주고 받는 것이니까. 그리고 예수 가라사대,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역시 보상은 같은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 선하신 분. 한 때는 구약의 하나님이 싫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내가 배운 그--구약의-- 하나님이란 징벌자이자 지역신 혹은 민족신에 가까운 면모를 주로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의 문제도 있었는데, 위와 같은 편견을 가지니 자연스럽게 최신의(?) 신약 보다 후져보이는 구약을 별로 읽어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개신교에선 징벌자로써의 하나님을 선보일 때마다 구약을 들이대며 훈계를 시도한다. "너희들 말 안들으면, (이렇게 무서운)하나님이 어흥한다!!" 훈계의 방향이라도 좋으면 다행이건만, 자신들의 교의와 권위를 옹호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들먹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답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이권과 이익을 위해서 빌어갔던 하나님을 벗어나기 까지 참 오래걸린 듯 싶다. 그..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