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양심

(2)
율법/양심 그리고 복음 행위라는 측면으로 부터 계속해서 조명해나간다면, 더이상 믿음과 행위를, 단순 대비시키기는 어려워 질 것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예수와 바울의 율법관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예수와 바울의 입장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막 써 재꼈다. 그래서 간단하게 언급한다면; 바울: 율법이란, 죄를 드러내는 도구와 같다. 그래서 나쁜 것을 피할 수는 있지만, 좋은 것을 내놓지는 못한다. 때문에 의로움을 위해서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요청이 필요해진다. 예수: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에서는 차이가 있어보인다. 공관복음: 바울과 달리 율법에서도 최소한의 좋은 것이 나올 수가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것은 복음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좀 많이 감상적인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어폐 오늘 올라온 영상을 보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대강 알겠는데, 윤홍식씨(이하 윤)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윤은 성령을 인간 안에서 양심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신성하고도 원리적인 존재라고 바라보는 듯 하다. [양심이 성령이니, 하나님이 양심이다거나, 참나의 자리(?) 등.] 그의 말을 참고하자며,이는 마치 에고를 제어하는 수퍼에고, 다시 말하자면 신성한 초자아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미 양심을 성령이 아니라 율법과 연관시켜 처리하고 있다. 즉 양심은 인간에게 주어졌으며, 그 작동 방식 역시 신성한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본다. 또 그리스도교의 성령을 말하자면, 단순히 내주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안팎으로 거하며, 성자와 완전히 동등한 그러면서도 구분되는 온전한 하나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