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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그리스도의 대속 혹은, 예속

예전에 썼듯이 나는, 더이상 원죄론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죄(죄성)을 상정하지 않는 경우 그리스도의 대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죄가 없다면 대속은 성립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희생도 무의미 해지는가?

 

물론 전혀 그렇지가 않다! 교단의 믿음에 따라선, 대속이란 원죄×구원론에 종속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대속은 원죄론이 없어도 되지만, 원죄×구원론은 대속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부패

원죄를 말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부패, 나아가 완전한 부패라는 개념에도 동의하는데, 나는 이를 선의 부재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다. 즉 유일지선(唯一至善)인 하나님과 동떨어진 피조물은 반드시 부패한 상태일 수 밖에 없으며, 빛이 없는 곳이란 암흑천지인 것과 같다.

 

그러나 원죄라는 별도의 신학적 장치를 두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서 그러한 것이 별개로 유전되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요, 주님과 멀어진 피조물이 부패했다고는 하나 그 멀어진 정도를 누가 정확하게 알겠는가? 다만 가늠할 뿐이다.

 

예속

나는 대속이 성립하는 구성 요소를 3가지로 보는데, 그 것은 희생-용서-화해다. 그리고 좀 더 덧붙이자면, 대속의 대는 예(豫/預)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즉 예언자/대언자의 경우 처럼 대속 대신 예속(豫贖)이라 말할 수있다는 것이고, 이렇게 본다면 아래와 같은 관점으로 바라 볼 수가 있다:

 

대신 {희생, 용서, 화해} → {희생, 용서, 화해}를 맡음[豫]

 

이렇게 본다면 대속이란 결국, 예언(자)의 연장이자 왕으로서 책임이며 제사장으로서의 직무가 되는 것이다.

 

속죄와 용서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바쳐 무었을 없이한 것일까? 사실 십자가에 앞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해야 죄를 없앨 수 있는지 가르치셨는데, 그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그러니까 대속이란 면에서 십자가 사건이란, 위의 메시지를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예언적-공공적-우주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며,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롭게 되었으며, 그 이름의 가치[값어치]를 인정받았다.

 

그런 즉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앙한다면, 그가 대리자로서 새로 계약한, 저 3가지 사항에 동의한다는 말이며, 인간의 구원이란 저 것들을 충족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편의주의적인 발상일 수도 있으나 때문에, 앞으로 친구가 될 이들을 위해서, 모든 걸 내놓고 피흘리는 큰 희생은 예수님이 대신 하셨으니, 이에 동의하는 이들은 보다 작은 걸로도 좋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 말해본다. 원죄가 필요한가? ㅎ

원죄×구원론은 그저 특정 공동체가 가지는 신앙의 습속에 불과하다.

 

잠시 정리하자면;

 

  • 무죄×대속: 처음 부터 끝까지 무죄한 인간이 대신 십자가에 올라 희생과 용서로서 의(義)의 이름을 제시함.
  • 원죄×대속: 모든 원죄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 희생하는 인간으로서 그 죄를 제거함.

 

※ 그리스도교에는 사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다. 주님의 자비란 원래 그런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식으로 가르치다보니 결국 지옥 없다 소리가 나오고, 죄/악이 활개치는 데도 용서라는 말을 흘린다.

 

[죄/악은 분리 서술해야하지만 일단은 퉁침;;

+그리고 돌이켜보는데, 용서라는 게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참 중요한 건데, 다른 것들보다 많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잠시 생각했던 걸 적으면; (뭐, 내가 용서하니 마니 해봤자 뭐가 달라지겠냐먀는, 관심이 가니 적어둔다).

 

일단은 크게 둘로 구분할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 조건과 비판을 기준삼는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조건·비판적 용서
  2. 무조건·무비판적 용서

 

첫 번째 유형의 장점은 잘잘못의 판별이 있으며, 개선 가능성이 주어진다. 단점으로는 비판성이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역으로 얻어 맞을 여지가 있다. 항구적인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것이 아니라면, 잘못된 비판에 따른 비판에 취약해질 만하니, 이 유형이라면 감정적인 상황에 대해서 꽤나 냉정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 버째 유형은 일단 여러모로 편해질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던지 좋은게 좋은거고, 적당히 눈감고 용서라는 행위(대개 도덕적으로 유효함)에서 만족할 수 있겠다. 단점으로는 여전히 해결되자 않는 문제와 용서했다고는 해도 풀리지 않는 것들이 남을 것이다.

 

나는 77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조건-무비판의 두 번째 유형이 아니라 첫 번째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칼 같은 조건과 날선 비판이 살아있으면서, 최적의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용서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

두 번째는 언듯 선하고 옳바른 가치를 지닌 것 처럼 보이지만, 악한 인간에게 무수한 용서란, 무한한 욕망을 채우기 위한 화수분으로나 적당하다.

]

 

물론 그런 삶을 소유하는 이들의 훌륭함에는 동의하지만, 훌륭한 건 훌륭한 것이고, 없는 건 없는 거다.

 

원죄×구원론

언제 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서방 교회의 원죄×구원론이 상당히 주술적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는데, 설명하자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끌어안은 다음, 죽음이라는 방법으로서 원죄와 동반자살하는 희생적인 이미지가 그 것이다.

[동반자살 까지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전개 방식을 두고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 용해보인다.]

 

그래서 이 때의 예수 그리스도는, 불경스럽겠지만 흡사 제웅과 같은 이미지로 그려질 수 있어보인다:

 

[이미지 출처: 드래곤볼, 제웅(동아일보)]

 

근데 많은 교우들이나 이상한 부류들도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는 것 같다.

 

 

덧.

다른 얘기지만 복음서와 서신서의 신학적 차이는 단일 선택이 아니라 다중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미 예수 그리스도 - 사도 베드로를 위시한 12제자 - 사도 바울은 한 몸이며, 그 방식이 조금 달랐던 건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 것이 성경에 실려 교회라는 공동체의 신앙 지침이 된 순간, 이 또한 주님이 제시한 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