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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X하려 하지 않아도 X해진다.

X하려 하지 않아도 X해진다.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고,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리고, 냄새 맡으려 하지 않아도 맡아지고, 맛보려 하지 않아도 맛보아지고 등등 하려 하지 않아도 되어지는 것들이 있다.

 

자연적으로 말하자면, 이 것들은 사물의 특성에 따라서 원래 부터 그러한 것들이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것이야 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좋은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좀 더 서쪽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약간은 다르게 변주되었다.

X를 바라지 않지만 X해진다.

보기를 바라지 않지만 보이고, 듣기를 바라지 않지만 들리고, 냄새 맡기를 바라지 않지만 맡아지고, 맛보기를 바라지 않지만 맡아지고 등등 바라지 않지만 되어지는 것들인 것이다.

 

고락으로 말하자면, 이 것들은 바라지 않지만 이루어지니 고통이다. 그래서 불교적인 인식에서는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지만 태어나고, 늙기를 바라지 않지만 늙어가고, 병들기를 바라지 않지만 병들고,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죽는다.

 

그러므로 도가와 불교의 차이는 자연철학과 심리철학의 차이에 있으며, 그 추구하는 바도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과 고통을 벗어나는 마음으로 갈린다. 솔직히 저 둘은 도무지 같을 수가 없어 보인다.

 

덧붙이자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위와 같은 사항에 대해서 어떻게 다룰까? 아마도 이럴 것이다.

X하려 하지만 잘 못 X한다.
또는, X하려 하지 않아도 잘 못 X한다.

보려 하지만 잘 못 보고, 들으려 하지만 잘 못 듣고, 냄새 맡으려 하지만 잘 못 맡고, 맛보려 하지만 잘 못 맛보는 등등 하려 하지만(하려 하지 않아도) 잘 못하고 빗나가는 것들이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는 물리적인 감각기에 대해서 이런 식의 관점은 없기 때문에 다소 억지스러운 감이 있어 보인다. 어디까지나 유대-그리스도교를 관통하는 주제란 범죄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는 것이라서 물리적인 영역을 포괄하는 영적인 빗나감일테니.

 

하지만 억지스럽더라도 전혀 다루지 못할 주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내 눈 안의 들보도 그렇고. 그리고 추구하는 관점을 분류하자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도의신학(?) 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덧. "범죄한"과 "범죄하는"에 대한 차이는 원죄 유무에 대한 차이로 이어질 듯 싶다.

 

덧2. 도의신학 의 도의는 도덕-의리라는 말이 아니라, 道(말씀)-義(의로움)이라는 의미로 넣었지만 불만족스러운 조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