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육신이란 옷을 입는다.
지금의 가톨릭은, 내부적으로 어디까지 전승되고 있을까?
나는 현재의 개신교는 과거로 부터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수도원으로 부터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는 개신교가 분리되기 전부터, 교회가 신비적인 것을 배척하는 경향을 가지면서 점차적으로 잃어버렸다고 생각되지만, 뭐 잘은 모르는 일이고…
대체로 이 기법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양식을 가지는데,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공통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중에 내가 알고 있는 이 양상은 최소한 3단계의 다른 상태를 거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것은 다음과 같다.
의식화 → 객관화 → 자기-타자화
[화살표는 일방적인 진행표시가 아님.]
위의 객관화 가 진행되면, 낯선 나(다른 나)를 만날 수 있는데, 그 낯설음은 아마도 정신과 육신 사이의 개념·시간차로써 발생할 것이다(뇌과학쪽 논문을 찾아본다면 결과가 있을 것 같다. 찾아보진 않음;;).
이 낯선 나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익히 말해지는 '육신으로의 나'가 되겠다. 다석이 주장하였던 '몸나'라는 개념(여기서는 '몸나희'로 변형)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되는데, 다석이 이론상으로 그렇게 주장한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다석의 주장은 너무 이원론적이라서, 이론적으로만 접근한 결과이거나 계통상(?) 다를 수 있겠다].
아무튼 이 몸나희는 추우면 옷을 입고, 더우면 옷을 벗으며, 배고프면 음식을 찾아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 불교라면 이를 두고서 습기에 젖어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 몸나희는 거짓 나 라고도 불릴 수 있는데, 일견 그렇게 보이는 것이, 보이는 나에 비하여 느껴진[느낌들의] 나는, 마치 사전에 주어진 패턴 대로 움직이는 것 처럼 느껴질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죄성(원죄)가 제시될 수 있는데 즉, 이 몸나희는 내 바람과는 다르게 온갖 욕망에 쩔어있으면서, 여기에 맞추어서 자동적으로[반사적으로] 행동하는 것 처럼 보여지기 때문.
다석의 몸나에 접미사를 붙여 몸나희로 변형하였다. 접미사 -희 라는 건 '너희'할 때의 그 -희다. 즉 복수 표기. 따라서 느껴진 나 라는 건 여러 느낌들의 총체로 부터 하나의 느낌으로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느낌들의 느낌.
영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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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 다석의 '얼나·맘나'란 용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넣지 않았고, '몸나'는 변형함.
- 다석은 그리스도교의 죄성(원죄)를 두고서, 불교의 삼독과 엮었지만, 내가 볼 때는 차라리 습기와 더 가까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