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 곧, '자기의'라는 것은 이와 같다.
"저 죽을 죄를 지은 죄 많은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자!"
'뭐, 나도 죄를 짓긴 하지만,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지?'
"저 음란한 무리를 몰아내자!"
'뭐, 나도 성적인 생각은 하지만, 물리칠 정도는 아니지?'
"저 인본적인[이상한] 신앙을 쳐부수자!"
'뭐, 나도 쉬지 않고 기도는 못하지만, 내 신앙은 정통이지?'
율법주의라는 건 단지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는, 그 것이 순전히 사적인 형태로서 만족될 뿐이라는데 있다. 공적이라는 것 역시 크게 보면 사적인 것을 바깥으로 넓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지역적인] 일을 추구하는 자를 두고서 소인이라고 하고, 전체의[국가적인] 대의를 추구하는 이를 두고서 대인이라고 한다지만,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서 서로 빨아주는 것으로 공공선을 달성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들도 내부에서나 하나님의 일이지, 바깥에서 보면 그저 인간의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그 것들은 사적으로 판별되고 있으며 작게는 개인이, 크게는 집단으로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판단을 멈추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가? 말씀은 이러하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1-6》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만약 비판·판별력을 상실해야만 한다면, 다음 구절에 등장하는 개·돼지도 구분해선 안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결국, 개인/집단이 생각하고 또 행하는 것들이 사적인 것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인다. 그 것은 사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며, 때로는 상대적일 뿐이라서, 내가 사적으로 소유하며 선한 가치라고 여기는 것들은 때와 장소, 인물과 문화 따위가 겹쳐있는 와중에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해진다.
선한 가치를 지키고 악한 것들을 멀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 것은 영원불변하지 않으며 조건이 달라지면 갈아치워질 것들이다. 세상에서 나고 자란 것들은 본디 허망하다.
그렇다면 내 신앙의 진정성은 어떠한가? 이 것도 사적인 것이고 허망한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가지고 있는] 신앙은 마땅히 사적인 것이고 허망한 것이다. 불면 흩어지는 바람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를 미루어 비판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또한 나는, 나를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성령을 바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