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이런저런 글을 썼던 적이 있지만, 오늘은 기존의 생각들을 다 뜯어고쳐야할 것 같다. 이를 위해서 반성할 점은 그간 동학에 대한 시선이 너무 동양 종교(유, 불, 선/무)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점이다.
아, 이 점은… 사실 문제가 아니다. 동학-천도교의 교리 전개나 오늘날의 교습 역시 그러하니까. 다만, 수운의 사상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이 스스로에게 있어서 문제였다는 것일 뿐이다.
동학은 이름 부터가 서학을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그리스도교적인 시선을 집어넣을 생각을 못했던 것이 불찰이었다.
내유신령(內有神靈)
일전에 나는 신령은 신명을 수정한 단어일 것이라고 주장했었지만, 만약 수운의 조어 규칙(?)를 따른다면, 신명→신령이 아니라 신명→영명 이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다산?). 따라서 이 주장은 철회.
강신→강령, 접신→접령
신명→영명(?)
신령은 말 그대로 신령인 듯(물론 산신령 같은 정령을 말하는 건 역시 아니다).
외유기화(外有氣化)
전에 이를 두고서 천지운화와 연관지어, 기운→기화 로 보았지만, 이제는 이 주장도 철회되어야만 할 것 같다.
이를 설명하려면 우선 강령(降靈)에 대한 말 부터 해야할 것 같다. 나는 동학의 강령을 무속적인 강신과의 연관성으로 보았는데, 조어 과정에 있어서는 이 관계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 것이 가지고 있는 진짜 모티프는 무속의 강신 즉, 신내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이 그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생이 모티프라면, 기화(氣化)의 의미가 정말로 명확해진다. 성자 하나님의 몸을 취하는 육화[成肉身]을 통해 예수가 이 땅에 오셨듯이, 동학의 하느님은 몸을 취하되 기화[成氣運]을 통해 내려오는 것이다.
大降者 氣化之願也
대강은 기화를 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 성모 마리아를 통해 나신 것 처럼, 동학의 하느님은 기접자(氣接者)를 통해 낳아진다는 것이며, 이 관계를 다시 돌이키면, 양천(養天) 즉, 하느님을 어린아이 처럼 기른다는 의미도 한층 더 강해진다.
더불어서 이런 구도로 본다면, 강화의 가르침[降話之敎]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의암 선생은 이를 두고서 "능히 말하고 웃고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모두 강화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는데, 구도상 말씀[로고스]와 비견할 만하다.
이 주장에는 꽤나 그리스도교적인 사고방식이 동원되고 있다. 즉 동학-천도교의 정통 교리에서 보이는 동등한 지기-한울과 달리 여기에서는 하늘/지극한 힘 사이에는 어떠한 위상차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표출(표현)이라도 전자는 그 처음에[성품에] 있어서 사람과 한울이 동등하여 내유신령과 외유기화는 스스로가 한울임을 재확인하는 것이 되겠지만, 후자는 하늘과 사람은 차이가 있으며 하늘의 기화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그 기원을 가늠하여 하늘과 사람이 같아진다.
암시적 | 조화적 | 명시적 | ||
지극한 힘[至氣] 하늘[天] 조화(造化) |
→ | 힘화[氣化] 또는, 성기운(成氣運) |
→ | 하느님[侍天主] 만사지(萬事知) |
허령창창 혼원일기 |
조화정 | 내유신령 외유기화 |
||
여러 마음 하나의 힘 |
여럿→하나 | 한 마음 여러 뜻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