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의 글에서도 적었지만, 혹시 나는, 지기 에 대해도 동학에 대해서 좀 잘 못 생각했던 것 같다는 느낌이 생겼다.
이 건 뭐… 다른 사람들도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 나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말하자면 '지기(至氣) 라는 개념이 생각보다 덜 추상적인 개념'일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니까 보통 지기를 말하면 일기 즉, 하나로 통합된 우주적인 에너지와 같은 이미지를 갖지만, 본디 이 아이디어는 그런 우주적인 개념으로 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매우 현실적인 대상으로 부터 이끌려져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허령창창(虛靈蒼蒼)
지기하면 따라오는 말이 허령창창(虛靈蒼蒼)인데, 보통 이 허령창창은 우주적이고도 현묘한 일기와 연관되어 '비었지만 가득찬' 것으로 해석된다. 정말일까? 그럼 허령창창 대신 좀더 흔해빠진 표현일 수 있는 허허령령(虛虛靈靈)이라거나 허허창창(虛虛蒼蒼)이 더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
알려진 바와 같이 허령이란 말은 성리학에서 허령지각으로 마음을 논하며 사용하던 용어다. 그렇다면 여기서 관점을 좀 바꿔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허령창창이라는 건 비었지만 가득찬 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허령 즉 마음(또는 이와 유사한 무엇)이 울창하게 들어찬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191208:
- 마음 대신(심정?) 허령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어떤 면에선 마음과 허령은 구분 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음… 단수(마음)와 ·복수(지기)의 차이일까? 마음은 허령지각으로 말해지는 것이지 허령창창은 아닌 것 같은?
- 허령 을 이해하기에 적합한 대상이 있다면 무엇일까? 식사를 마치고, 코코아차를 마시고, 물을 마시는 중에 문득 그릇에 담긴 마실 물에 눈이 간다. 그러고 보니 동학-천도교에서는 맑은 물(청수)를 중시한다는 것도 연이어 떠오른다.
그렇다면 허령은 마치… 저 그릇의 물과 같지 않은가?! (feat. 天一生水)]
일기(一氣)
허령창창이란 표현이 일종의 '마음의 숲'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면, 일기에 대한 시선도 약간은 달라진다. 크게 보면은… 뭐 그게 그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단일한 무언가가 아닌 좀 더 복합적인 무언가가 된다.
또, 이 일기가 '우주로'가 아닌 '마음으로' 부터 도출되고 있다면, 지기는 현학적인 대상이 아니라 실제·경험적인 현상으로 부터 추출되고 또,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고아정(顧我情)이란 말 부터 곧 마음이었다.
수운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만물유정(萬物有情)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위의 고아정의 정(情)도 실은 심성론이기 보다는 존재론에 가까운 발언이 되며, 감정을 말하는 것은 제대로된 해석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훈독 그대로 '뜻'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내 뜻을 돌아보라!
삼교합일(三敎合一)
전에도 적었지만, 나는 동학의 삼교합일이 마데 인 지나 즉, 중국발 원류에 기인한 사상적 통합이라고 떠든 적이 있었지만, 이 것도 재고해야할 듯 싶다.
만약 지기 라는 개념이 마음의 숲이라면 삼교합일이라는 것은 발생적인 유사성에 근거한 통합이 아니라 만물이 추구하는 마음을 통칭한 것 처럼, 좀 더 보편적인 시선에서 상이한 가치 추구가 있는 것들을 담아내었다는 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그렇다면 삼교라는 건 상징적으로 메타적으로 대표성 있는 것들을 단순히 갈음하였다는 것에 다름 없다.
주님과 제물
지기의 정체가 마음의 숲이라면, 아… 수운에게 하느님이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고 한 것도 정말 잘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또 공경하여 님을 붙여서 천주라고 한다는 것도 지기를 표현하기에 아주아주 적합한 말이다.
보통 이 공경이란 말을 두고서 지고지순한 마음에 예를 갖추어서 모신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다시 생각하자면 이는 지기 즉, 지극한 힘에 대한 경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밀고 나가는 힘(뜻)은 만물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부여하고[命]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며[涉],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움켜쥐고 흔들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 것은 운명의 주인이자 자기 소산의 주님이겠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만물에 녹아 있다는 점[만물이 품어야만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 것은 먹혀지는 것으로써 먹이-음식-양식이나 마찬가지니 이를 종교적으로 이름한다면 곧 제물이다. 제물일 경우에는 경외감 덜하니 '-님'은 날아가고 보통으로 하늘[天]이된다. 해월은 이를 두고서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 하였다. 이천식천으로써 먹이가 된 천은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고[命],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며[涉], 뭇 생명들이 그 삶을 이어가도록 만든다.
[※ 하늘 이라는 대상은 어떤 점에서 공기와 같다. 올려다 보면 머리 꼭대기에 놓여 있지만, 한 편으로는 땅에 맞대어 있으면서 생명을 부여하는 것[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다. 반면 한울 이라는 명칭은 음… 한 울타리?]
지기 곧, 지극한 힘
지극한 힘 이라는 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가장 손쉬운 대답은 아마도 개벽일 것이다. 그래서 그 것은 말 그대로 여는 힘이다. 수운은 유불선을 말하며 누천년에 운이 다한 가르침들이라 하는데, 그 것들을 모두 높은 수준에서 조망하자면 사실상 모두 이 지극한 힘, 현실 변혁을 일으키는 힘을 추종하는 세력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다.
※ 이 지극한 힘은 꼭 종교적인 것에서 뿐 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드러난다. 그 것들은 이 힘으로 살아가고, 이 힘이 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를 '생명'이라 부르며 찬가를 부르지만, 실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말이 함의하는 것 처럼 여기에는 반드시 어떤 면에서든 죽음이 따라 붙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극한 이 힘은 한 편으론 폭력적이다. 수운의 외침 처럼, 개 같은 왜놈들을 한 번에 쓸어내려던 힘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폭력은 가치중립적으로 쓰인 것이다. "폭력은 무조건 나빠요! 빼애액" 같은 생각으로 쓴 건이 아님.]
번외: 임금와 창녀
신화적인 이미지를 덧씌운다면, 지기란 만물에 군림하여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임금과 같지만, 한 편으로는 누구에게나 제몸을 내어준다는 점에서 성녀로 포장되는 창녀와 같다.
본디 유학자였던 수운이나 그 후신인 동학-천도교(인)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이미지겠지만, 아주 예전, 고대 종교였다면 이런 소재로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지기라는 개념은 위의 폭력성과 같이 어떤 형태로의 자극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삐끗하면 그렇게 전개되거나 이용될 가능성이 있겠다.
[동학-천도교 내부에서는 여기에 대한 방지책 같은 개념이 있을까 싶지만 달리 없는 것 같다. '부모 처럼 섬긴다'거나 '아이와 같이 기른다'거나 '곡식 키우듯이 짓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저 인간의 선한(?) 태도에 맡긴다는 것 같다(무위이화?).
이건 정말 '농경문화권의 한국인'이라는 지역적 사고관의 소산인 듯. 아니면 내가 모르는, 개념들간의 상호작용에 의한 어떤 방향성이나 패턴이 나있다던지? 흠…]
덧.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힘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어… 나는 정교회에서 말하는 신화(神化)가 이와 연관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신화의 예에서 보듯이 보편성 있게 다뤄지기 보다는 조금은 특수하게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번 글에서 쓴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승한는 그리스도교는 지극한 힘을 통하는 구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것은 십자가의 구원론과도 완전히 무관하다. 하지만 은총으로서 혹 말해질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보다 제한되고, 정제된 형태로.[…라고 써보았는데, 과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