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화라는 건 편의상 붙여둔 것으로 "~을 의식하다" 정도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것의 목적은 오로지 단순한 한 가지로, '정신(마음)과 육신(몸)을 분별하기 위한 자기 정의' 정도로 말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는 환기나 분산 혹은 집중 등의 어떠한 정신 작용이나 뭔가의 방법들이 곁들여질 수는 있겠지만, 그 것들은 일시적인 수단일 뿐 그 것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의식화를 진행하기에 앞서 먼저 정신과 육신의 특성을 정의해둘 필요성이 있겠지만, 자세한 건 옛 사람들이나 현대 과학의 글들을 참고하면 될 것 같고, 나로서는 별다른 조예가 없으니 대체로 그 활동성을 근거로 삼아서, 다음과 같은 구도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족하였다.
영혼: 살다, 삶…….
⎡ 정신: 알다, 앎, 아는 가짐.
⎣ 육신: 하다, 함, 하는 가짐.
즉, '뭔가를 하는 중에, 그 것을 아는 상태'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 정도가 되겠다. 또, 정신과 육신의 활동에는 뜻이 있을 수도 있고(바는 것과 타는 것), 없을 수도 있지만(아는 것과 하는 것), 의식화 단계에서 이러한 분별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는 그렇다. 이 것은 정신 운동에 가깝다(뇌 운동?). 어… 자건거 타기와 가깝지 않을까? 처음에는 세발, 다음에는 네발-세발, 그리고는 두발.[그러다가 외발?] 그러니까 결국 익숙함과 배핫(습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져서 고통받을 뿐이다.
나 같은 초보는 운동장에 가서, 적당히 세발로 굴리다가 두발까지 갈 수 있으면 가고 아니면 뭐…;;
좀 더 덧붙이자면, 의식화라고 하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것 같지만, 그 건 의식화가 아니라 의식 집중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의식화는 정신(앎)과 육신(함)을 분별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자전거를 탄다는 건, 고도의 집중력으로 제자리에서 중심잡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관성에 의해 움직이면서 매끄럽게 나아가는 걸 말한다.
또한, '아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하)는 것'은, 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 되므로 껄끄러워질 수 있다(주의). 사족을 달자면, 이 앎, 정신의 아는 것 이란 마땅히 무위이화 즉, 하는 바 없이 되는 것이다.
덧. 의식화를 포함하는[넘어가는] 객관화는 내게 주어져 있는[내가 포함되어 있는] 공간(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변으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