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끔일지/메모장

경륜과 부재

하나님의 부재(不在)……. 일찍이 예수는 이렇게 부재를 외쳤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그분께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마태 27:46-50》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세상 속에서

경륜의 중심에는 항상 주님의 부재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록 더욱 더 은혜로워야만 할 것 같지만, 생각 보다는 그렇지가 않아보인다. 이 부재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다는 심연일까? 세상 위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 선하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사람이 만족스러운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를 않는다.


예언자들의 한탄과 성모의 슬픔, 이야기 속 욥이 폭삭 망하는 등, 땅 위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재해, 전쟁 속 참사, 개인의 완전한 파멸 혹은 국가의 추락 같은 공동체의 파괴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섭리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늬들의 죄 때문이다"라고 쉬이 말하기에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며, 이는 죄가 아닌 소명이라 하더라도 그 고통이 지난하기는 매한가지다.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사람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전적인 모범/모델'인 예수가 그의 사역의 절정이었던 십자가 위에서 한 일은 뭐였을까? 사실 그 곳에서 예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고통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구세주로서의 역할에 흠이되어서(?)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지만, 십자가에 위의 예수는 단지 그 때, 그 곳에, 그렇게 매달려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예수는 자신을 매달은 자들의 죄를 가감 없이 드러냈으며, 그렇게 죽음으로써 그 죄가 무죄한 인간을 피흘리며[고통 받으며] 죽게 만든다는 것도 보여주었고, 뭇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선 채, 자신의 생명을 소진시켜가며 사명을 다하였다.


나는 예수의 피가 어떠한 기적적인 역할을 하였거나 혹은 마술 같은 힘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무력했던 것과 같이 그의 피도 무력했다. 그렇게 모든 면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경륜과 부재 속에 놓여졌다가 마침내 승리의 때를 맞아 그 자체로서 사역이 완수된 것이니, 그가 의롭게 되었을 때[부활하였을 때] 그가 흘렸던 피도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다.


[애초에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되었던 건, 그가 선보인 놀라운 이적 때문이 아니라, 그의 행적들이 마치 놀라운 하나님 같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하나님 같이 가르치고, 하나님 같이 고쳐주며, 하나님 같이 이끌어가는 이. 이적은 지난 날의 예언자, 심지어 이교도들도 부릴 줄 아는 것이니, 그런 것들은 믿음을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덧.

새로움 앞에서

경륜의 중심 혹은 첨단에 자리잡은 부재의 때를 맞아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앞서간 이를 통해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의 부재 속에 놓여진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이 주어졌으며, 이 과정을 통하여 부재 속 하나님을 넘어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새로움 앞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