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어떤 칼럼을 보니 이런 글이 써있더라.
또 정말 구원 상실이 가능하다면, 구원받는 것은 누구 덕분이고 상실하는 것은 누구 탓인지, 예컨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 덕분이고, 구원 상실은 인간 탓인지 듣고 싶습니다. 만일 '인간 탓(because of man)'으로 '하나님 덕분(by virtue of God)'에 얻은 구원을 잃게 된다면, '구원하는 하나님 능력'보다 '구원을 잃게 하는 인간의 능력'이 더 강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약하고서야, 어떻게 시작부터 종말까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필자는 칼럼도 꾸준히 쓰고 있던데, 지금 까지 쓴 건 대체 뭐였을까? 질문의 주제는 칭의유보적이라고 하면서, 내용 전개와 결론은 확정적인[법정적인] 칭의 관념에서나 나올 법하다. 유보적이라는 건 현재 진행 중[되어가는 중]이란 것이니, '덕분'과 '탓'은 지금 꺼낼 말이 아니고, 자문자답하는 것 역시 아귀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다음.
신인협력주의자들 역시 구원에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변호하려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3-24)'는 말씀을 잘 인용하는데, 이 역시 웬만큼의 노력으로는 구원 얻기가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고, 좁은 문인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뜻입니다(이병규 박사).
헛소리다. 저 구절 어디에서 '오직 믿음'이란 결론을 이끌어낸다는걸까? 앞뒤 까지 보자.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누가 13:22-30》
비슷한 구절을 마태복음에서 보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 7:13-23》
'오직 믿음'은 어디에 있는걸까? 오히려 행하는 자가 간다는데?
다음.
그리고 자신들의 구원 상실을 막기 위해 실제로, 현재 어느 정도 각고의 노력을 기우리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들이 곧잘 들고 나오는 '성령을 쫓아 행한다(갈 5:16)'는 식의 막연한 답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느 정도 성화의 삶을 일구고 있는지 만인이 수긍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조차도 행위구원론을 부정한다. 필자는 누구를 향해서 계속 저리 묻고 있는걸까? 아니,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긴 하는 걸까?
그리고 법정적 칭의를 받아서(?) 그런지, 준엄한 심판을 내리는 법관 처럼, 자신감 넘치는 필자의 모습에 나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칭의를 받았다는데, 그거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증거라도 있어요?"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말 말고, 누구나 보편적으로 '와! 칭의 맞네요!'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보여주었으면 한다. 타인의 신앙을 파고들려면 일단 본인의 것 부터 꺼내보이는게 도리에 맞을 것이니.
덧.
긴 연휴를 맞아서 그런걸까? 칼럼의 상태가 전 보다 나쁘다.
전에 있는 것들도 말만 조금씩 다를뿐 녹음기 틀어놓은 것 같더만…….
덧2.
바울 서신 구절도 앞뒤로 같이보면 필자의 주장과는 다르게 보일 수 있겠다(해보진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