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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일지/메모장

몇 가지.

오늘은 알코올이 들어간 관계로 다시 구성.



먼저 구분 및 분리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다.

  • 중생과 칭의에 대한 구분(및 분리).
    • 아래 두 항목에 영향을 받는다.
  • 복음서와 바울 서신서에 대한 구분 및 분리.
  • 바울계 서신서와 나머지 서신서에 대한 구분 및 분리.


나는 대체로 이런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여러 책에서 특정 구절의 인용이 마구잡이로 뽑혀져 사용되는 것에 불만이 많으며, 정통이든 사이비든 그런 식의 구성 자체를 싫어한다.[사이비는 정통이란 자들의 방법론을 차용할 뿐이므로, 그 특성이 어디 가겠느냐마는.]


그래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럴싸하게 막 가져다 쓰지 못함이 심히 안따깝다. 나로서는 어찌되었든 나중을 기약해 볼 수 밖에.




첫 번째. 국내 개신교 일부(이하 개신교)에 있어서 가장 큰 폐습을 꼽자면, '필요에 따라서 취사선택하려는 안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이는 루터를 경유하여 이어오는 폐단에 가까운데, 루터가 자기 신학을 위해서 취사선택을 하더니 그 후예들도 이를 그대로 베끼다가 결국 자기들끼리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식이 되버리고 만 것이다.

바울의 예를 들어보자. 바울은 성령의 은총 말하면서 그 은혜와 함께 열매를 강조하고 또 말한다. 하지만 교회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은혜는 백번 천번 강조하면서도, 그 열매에 대한 이야기는 필요할 때만 슬그머니 끼워넣는 식이다. 그러다 불필요하다 싶어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치워버린 뒤에, 그 은혜만을 열나게 강조한다.

이번엔 은혜에 대해서 말해보자.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붇고, 예수를 찾아 높은 곳으로 향하였던 이들이 벌인 행동은 왜 생각하지 않을까? 그들이 향유를 구해와 머리로 발을 닦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부르짖다가 확고한 결심을 세웠던건 보이지도 않나보다. 이런 사항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앞뒤 다 잘라 버리고, 걍 은혜 뿐인가?



두 번째. 개신교는 바울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을 조명하려면 그의 급진성 역시 같이 조명되어야 하지만 왠일인지 이는 매우 꺼려하는 편이다. 왜 그럴까? 그의 사상과 행동이 나올 수 있는 배경 중 하나는 이 '급진성' 꽤나 큰 원천인데? 설마 그 말만 떼어다가 자기 식대로 인용하기 바빠서 그렇진 않겠지?

위에서도 그렇지만, 그렇게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쓰려다가는, 엉뚱한 놈들에게 빌미를 주기 쉽다. 그들이 교회에서 외면하거나 회피하던 부분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게 되는 것인데, 이런 현실 속에서 "신도들의 교리 공부가 부족해서" 같은 말만 앵무새 처럼 반복하며, 현실이 타파되기를 바라는[하나님의 은혜 만이 내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뉴스거리가 될 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되는 것이다.



세 번째. 구원의 비유에 대해서 살펴 보자.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바울이 의를 옷에 비유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는 신비체를 말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 부분은 바울의 아이디어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딱히 다른 설명 역시 불필요하다.

문제는 후속 사태가 일어나느냐 마느냐인 것인데, 여기에 대한 파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구원의 요소인 '의'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실은 그러한 말을 한 사람(바울)과 그 것이 기록된 문헌(성경)에 대한 관점에 따라서 변경된다. 다시 말하자면, 의의 전가니 주입이니 하는 것 보다 바울에 대한 이해가 더욱 상위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 옷에 대한 비유 만을 말하자면, 비신체적 요소로서 '합쳐질 수 없다'는 사항 보다는, 보다 일반적인 관점 즉, '그(옷) 안에 있다'는 점에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전가니 주입이나 하는 후대의 사항을 대입하다 보니, 전혀 엉뚱한 소리가 나오게되는 걸 두고서 어떻게 평해야 할까?


다음은 '죄인이면서 의인' 같은 소린데, 여기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구절이 있다면 이건 유보적인 신앙관으로 표현하기에도 적절하다는 것만 써두어 본다.




알코올 파워로 날림 수정.